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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다시보기만 50번째 _ 첫 키스만 50번째, 피터 시걸 감독

그냥_ 2018. 12. 1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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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특별한 영화는 아닙니다. 꼭 봐야 할 명작도 흥행에 성공한 대작도 영화사에 남을 걸작도 아니죠. 매년 대여섯 편씩은 나오는 흔해빠진 할리우드식 가족형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아역 출신 배우 드류 베리모어 최고의 영화도, 미국식 코미디 드라마의 대가 아담 샌들러 최고의 영화도 아니죠. 국내 관객은 겨우 22만. 이 정도면 적어도 한국에선 망했다고 봐야겠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글의 제목처럼 이 영화를 셀 수 없을 만큼 보고 또 봤습니다. 좋아하니까요.

 

 

 

 

 

 

 

 

'피터 시걸' 감독,

『첫 키스만 50번째 :: 50 First Kisses』입니다.

 

 

 

 

 

# 1.

 

[주인공]은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저주는 금기와 의식 따위로 연결됩니다. 저주는 본인의 과오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이후 이야기는 주인공이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으로 점철됩니다. 묘사는 인물의 행동보다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주인공에겐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저주는 상대 인물, [적대자]의 행동에 지배되며 행동은 대부분 [사랑]에 기반합니다. 적대자가 저주를 풀기 위한 사랑의 퍼즐을 맞출 때까지 주인공을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죠. 해방의 조건은 보통 저주를 처음 만든 존재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 2.

 

이 같은 구조의 서사는 다시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캐릭터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단계입니다. 관객은 주인공의 저주를 소개받지만 아직 이유는 모릅니다. 적대자 역시 소개됩니다. 두 인물은 어떤 이유에서건 서로 밀어내는 상황에 놓여있는데요. 주인공이 적대자를 밀어내는 것일 수도 적대자가 주인공을 밀어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적대자는 점점 주인공의 저주에 감정적 동화를 이룹니다. 두 번째는 주인공과 적대자의 관계를 강조하는 단계입니다. 관계가 깊어갈수록 적대자는 자신의 자질을 활용해 주인공의 내면을 조정합니다. 둘 사이의 밀착감은 강화되고, 대부분 이 정서는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은 주인공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두 번째 단계 동안 관객도 아직 이해할 수 없고 캐릭터들도 아직 인지할 수 없는 탈출의 조건이 축적됩니다. 세 번째는 해방의 조건이 충족되어 절정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운명적 결말이죠. 이 단계에서 저주의 내용과 원인이 밝혀지고 복선이 회수되며 탈출의 조건들이 작동하는 방식이 설명됩니다. 관객은 저주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그 역시 대부분 사랑의 위대함으로 귀결됩니다.

 

여기까지가 로널드 B. 토비아스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20 Master Plots: And How To Build Them)에 나오는 변신/변모의 플롯입니다. <빨간 모자>나 <늑대인간> 혹은 <개구리 왕자>나 <미녀와 야수> 등의 고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플롯이죠. 교양 과목으로 스토리텔링 강의를 들었던 보람이 있군요.

 

 

 

 

 

 

# 3.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는 이 변신의 플롯을 충실히 따릅니다. 루시는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을 잃는 단기 기억상실이라는 저주에 걸려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단기 기억상실이 저주라는 게 아니라 플롯에 있어서 [저주]로서 기능한다는 뜻이니까요.) 영화의 내용 역시 이 저주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로 그려집니다.

 

초반은 슬픈 공주님 루시와 적대자인 유쾌한 바람둥이 헨리가 만나는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루시의 등장은 두 사람의 만남이 운명적임을 풍부하게 묘사합니다. 헨리는 루시가 단기 기억상실을 앓고 있음을 알고 당황하지만 왜 그런 저주를 얻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헨리에게 루시는 하룻밤 쉽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상대에서 점점 깊은 사랑을 나누고픈 사람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점점 루시와 헨리의 사랑은 깊어갑니다. 50번의 첫 키스 역시 이 단계에서 모조리 쏟아지죠. 부럽네요.

 

헨리는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이 루시의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튿날 아침이면 모든 걸 잊어버리는 루시에게 저런 데이트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관객도 루시도 헨리도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데이트의 기억은 성실히 축적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절정. 루시의 기억상실이 그녀의 잘못으로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음이 밝혀지고 그동안 헨리의 노력이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다는 의사의 단호한 선고가 내려집니다.

 

절망한 루시는 헨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상심한 헨리가 홀로 하와이를 떠나가려는 그때, The Beach Boys의 <Wouldn't it be nice>의 멜로디와 함께 누적되어 왔던 사랑의 기억이 무의식 깊은 곳에 쌓여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저주를 극복하는 순간인 거죠. 운명적인 사랑 덕에 루시는 아빠의 신문과 동생의 케이크와 엄마 친구의 연기에 갇힌 삶을 벗어나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 4.

 

영화가 성실히 따라가던 플롯을 비켜나는,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지점은 바로 이 결론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이었다면 헨리의 헌신적 사랑으로 루시의 단기 기억상실이 치유되었다. 가 결론이어야 하는 데 그녀는 자신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거든요. 헨리와 결혼한 후에도 루시는 여전히 자기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입니다. 이 같은 결말 덕에 사랑은 저주를 극복하며 그 힘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닌, 저주도 가로막지 못하는 본질적인 목적으로 승화됩니다.

 

비틀린 결말은 과거 작품에 비해 보다 철학적이며 현대적이고 인본적이며 따뜻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따뜻하지만 슬픈 하와이를 떠나 빙하가 보이는 춥지만 행복한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가 겉으로 보이는 저주가 아닌 사람의 내면에 깃든 사랑에 있음을 온도를 활용해 역설적으로 묘사하는 셈입니다. 하와이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이즈라엘 카마카위오올레의 <over the rainbow & what a wonderful world>가 하와이가 아닌 빙하와 함께 울려 퍼진다는 모순된 연출은 이런 역설을 더욱 강조하죠. 차가운 얼음성에 갇힌 공주님을 모셔다 꽃피는 성으로 구해 나오는 대신 따뜻하고 평화로운 하와이에 차려진 인위적인 삶에 갇혀있던 루시는 춥지만 살아있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으로 구원됩니다.

 

 

 

 

 

 

# 5.

 

처음 영화를 본 후 제 꿈은 어찌 살든 노년은 하와이에서 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요. 영화 속 하와이는 현실에 구현한 천국처럼 묘사됩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온화하며 여유롭고 따뜻하고 풍요롭죠. 사랑하는 아빠와 동생,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는 '수'도 있구요. 언제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그들 간엔 성전환을 하든 상처가 있든 누구도 개의치 않는 평등함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은 벗어나야 하는 곳입니다. 왜? 루시는 자주적이지 못하니까요. 99분 동안 사랑을 말하고 50번의 첫 키스를 건네는 이 영화는 사실 '사랑'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주적인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고 있습니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사랑스러운 동물들은 루시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들은 모두 헨리의 사랑과 진심을 가득 담은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관람객에게 보이기 위해 아쿠아리움에 갇혀있는 신세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심과 사랑으로 보호받는 대가로 자주적이고 연속적인 삶이 제약된 루시는 사실 그 아쿠아리움의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헨리의 꿈이 자유로운 해양생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대양으로 떠나는 것이었다는 설정은 이 남자가 결국 루시 공주님을 구원할 기사님이었다는 걸 암시하는 복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보호는 그것이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올바르다 할 수 없지 않을까? 이 평화로운 하와이가 루시에게 진짜 평화로운 천국인 걸까? 영화는 로맨스의 이면에 슬그머니 질문을 건넵니다. 피터 시걸 감독, <첫 키스만 50번째>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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