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혹시 그럴 때 없으신가요? 우리 모두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 삶의 시계가 죽기 10분 전, 5분 전, 1분 전, 1초 전에 반드시 도달하리라는 절망감. 그 순간에도 지금처럼 살아있어야만 하는구나 라는 공포감. 이따금 그런 생각이 엄습할 때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식은땀을 닦게 되는 게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때문에 한 번쯤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도 하실 겁니다. 100년, 1000년, 10000년.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없어지면 힘들 거라고? 웃기고 있네. 넌 뭐 살아봤냐? 라는 식의 철없는 망상이랄까요. 이런 범용적이고 간편한 상상이 영화에 쓰이지 않을 리가 없죠. 오늘은 14000년이나 살아온 크로마뇽인을 이야기해 봅시다.
'리처드 쉥크만' 감독,
『맨 프럼 어스 :: Man from Earth』입니다.
# 1.
'존'이란 아싸가 잠수 타기 전에 친구들에게 자신이 원시인이라고 질렀다가 1시간 넘게 갈굼 당하고, 솔로 1일 차 홀아비가 헛소리에 빡쳐서 총 쏴서 죽이려 하자 훼이크다, 이 교수들아! 벽난로 아래 옹기종기 모여 베토벤 음악 듣다 신실한 할머니가 임페리우스처럼 신성모독을 외치고, 집 나간 아빠가 젊고 잘생긴 풍성충이란 걸 알게 된 노안의 배 나온 머머리 아들이 깜짝 놀라 마누라 만나러 하늘나라로 가고, 아빠는 허둥지둥 새 여자랑 이사 간다는 영화입니다.
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과장을 눈 앞에 둔 건실한 교수 '존 올드맨'이 갑자기 교직을 은퇴하겠다고 하자 동료들이 모여 작별인사 겸 수다 떨다가 집에 간다가 전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니 플롯이랄 것도 없구요. 따라갈 플롯이 없으니 캐릭터도 관계도 없습니다. 감독의 연출이 개입할 여지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저 참신한 발상과 주제의식,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얽히고설킨 각본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감독 '리처드 쉥크만'의 것도 주연배우 '데이빗 리 스미스'의 것도 아닌, 각본가 '제롬 빅스비'의 영화라 할 수 있겠죠.
# 2.
가구만 투박하게 남은 집에서 8명의 남녀가 조촐한 수다를 나눕니다. 영화의 공간은 존이 떠나면 버려질 집뿐입니다. 다른 곳은 짧은 회상으로도 전혀 등장하지 않죠. 인물들 역시 과감한 동작보다는 대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합니다. 감독이 놀 터라곤 공간 밖엔 없는 셈이니 영화에서 공간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존의 집은 '존 올드맨'이라는 지구에서 온 인간 그 자체처럼 보입니다. 존의 집에 쌓여있던 물건들은 실체적이고 물리적이지만 동시에 버려지고 죽은 것들이죠. 새로운 10년을 향해 떠나는 존은 개중에 필요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가져가고 대부분의 물건들은 버립니다. 마치 존의 의사와 상관없이 새겨진 기억들과 버려진 기억들처럼 말이죠. 이 분류는 지극히 개인적 기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똑같이 인류사적으로 중요해 보이는 고흐의 그림과 돌도끼이지만, 존은 고흐의 그림을 차에 싣고 돌도끼는 주저 없이 버립니다. 인류사적 중요도란 게 정작 정말 중요한 본질에 닿아 있는가를 되묻는 듯하죠.
동시에 이 집은 인류의 믿음 그 자체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모임이 시작되는 낮에는 온갖 물건들로 들어차 있는 이 집은 존의 이야기가 깊어 갈수록 점점 비워집니다. 저녁이 되면 짐들도 모두 집 밖으로 나가고 가구도 소파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비워지죠. 밤이 깊어 어둠이 찾아오면 그렇게 비워진 집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건 벽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뿐이죠. 동료에게 알려진 학과장을 앞둔 '교수 존'에 대응되는 실물은 누적되는 존재이며 번거롭고 허무하고 사실적인 지언정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합니다. 반면 14000년을 살아온 '자연인 존'에 대응되는 불빛은 휘발할지 언정 선명하고 살아있으며 동시에 본질적입니다. 'Keep Walking'이란 슬로건의 술에 취해있던 사람들은 깊은 밤 불빛 아래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내죠.
# 3.
각각의 교수들은 역사학, 생물학, 신학, 심리학 교수입니다. 역사학 교수는 누적된 정보에 기반한 귀납적 지식에 대한 믿음을, 생물학 교수는 이론에 기반한 연역적 지식에 대한 믿음을, 심리학 교수는 프로이트적인 인식론에 대한 믿음을, 신학 교수는 신앙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대변합니다. 14000년을 산 늙은 크로마뇽인의 존재는 인류가 쌓아온 이 모든 종류의 지식과 신념적 혹은 신앙적 믿음의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믿고 믿고 또 믿으려고 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결국 사유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믿게 되는 걸까요. 뭔가 데카르트스럽네요.
5센티처럼 보이는 3센티는 몇 센티일까요. 이 영화는 당신이 5센티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심지어 믿어 왔을지도 모를 어떤 것들에 자를 들이대며 '야, 그거 어쩌면 3센티일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며 고증을 하려 들거나 논리적 비약 혹은 빈약을 찾으려 드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설령 '존 올드맨'의 이야기에 허점이 있다 하더라도 교수들이 믿는 바(5센티)가 달라지지도, 올드맨이라는 존재(3센티)가 없어지지도 않으니까요. 이 영화는 그저 묻는 겁니다. 당신의 확신은 확실한가. 당신의 믿음은 믿을 만 한가.
예수가 실제 불자냐 아니냐 역시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불자였던 들 실제 부활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가 사실 존 올드맨이었든 아니든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알고 난 이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사람들도 그대로고 세상의 모든 사실들은 그대로입니다. 이 영화로 인해 예수 불자설이 그럴싸한데? 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으신가요? 견고한 신앙적 믿음에 작은 파동을 던지는 영화를 통해 다시 자신의 신앙적 믿음을 강화하는 셈이니까요. 그들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셈입니다.
# 4.
영화의 아쉬운 점은 제가 한국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후반부를 끌고 나가는 기독교 코드가 잘 와 닿지는 않거든요. 우리에게 기독교는 불교와 더불어 신자가 무지막지하게 많은 대중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반면 서양에서의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죠. 그들에게 기독교는 신앙심과 별개로 규범이자 문화이고 역사이자 동시에 철학입니다. 우리에겐 다소간 뜬금없다고 느껴질 예수 논쟁이 서양사람들에겐 전혀 다르게 와 닿았을 겁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조선시대 유학자가 '알고 보니 공자는 서양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충격에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니 감성적 내면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 아프다, 아이가 사라졌다, 같은 서사가 있어야 동화가 일어날 테니까요. 대신 '이성적' 내면화에 성공한다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분야를 넘나드는 각계 교수들의 질문에 몰입했다가, 동시에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살아온 한 인간의 멘탈리티에 몰입하고, 또 소중한 사람을 필연적으로 먼저 잃어야 하는 사람과, 나와 다른 시간 속에 사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지극히 이성적인 시각에서 넘나들어야 합니다. 이 몰입에 성공한다면 이 영화는 작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적 유희가, 크게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조율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할리우드의 힘은 수백억을 가볍게 때려 박는 세계화된 블럭버스터들을 찍어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과감하고 철학적인 주제로도 이런 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겠죠. 누군가 대작이나 걸작 아닌 섬세하게 잘 빚은 '명작'을 소개해달라고 하신다면 전 이 영화를 그 리스트에 올리겠습니다. '리처드 쉥크만' 감독, '제롬 빅스비' 각본. 『맨 프럼 어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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