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시즈카는 '구원'하고 코스기는 '배제'한다.
이시다 유스케 감독,
『좀 100: 좀비가 되기 전에 하고 싶은 100가지』입니다.
# 1.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작품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일본 좀비 호러라는 말에 혹했을 뿐이었죠. 100이라는 숫자가 흥미를 돋운 면은 있습니다. 좀비 100마리가 덮치려나? 100일? 100시간? 아니면 100분을 버텨야 하나? 백신을 100초 안에 써야 한다는 설정인 건가? 등등의 상상을 했었는데요. 부제가 <좀비가 되기 전에 하고 싶은 100가지>였더라고요. 아하, 똥꼬 발랄 청춘물이군요.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작품인 줄 몰랐다 말씀드렸는데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일본 ANIME 특유의 톤 앤 매너가 영화에 너무 짙게 묻어나고 있거든요. 실제 원작의 존재를 모르고 영화를 봤고, 아직까지 굳이 원작을 보지 않았음에도 요소요소마다 만화적 연출, 이를테면 대사처리라거나 캐릭터 외형 디자인 등에서 머릿속에 애니메이션이 자동 재생되는 듯한 기시감이 미친 듯 몰려옵니다. 특유의 영웅주의. 공동체를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던지는 개인의 숭고한 희생을 숭배하는 카미카제 감성도 여지없죠. 비슷한 류의 작품을 볼 때마다 애니메이션을 고스란히 복사하는 이 놈의 집착은 대체 언제 버리려나 싶긴 한데요. 역으로 '이쯤 되면 너도 그런 건 감안하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실사화 문제는 영화 내내 과장된 웃음을 지어야 했던 아카소 에이지의 경직된 입꼬리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죠.
# 2.
좀비! 호러! 아포칼립스! 액션! 스릴러! 서바이벌! 코미디! 드라마! 를 표방하고 있긴 한데요. 전통적인 좀비 호러물은 아닙니다. 뜸 들이는 과정 없이 처음부터 좀비를 보여주고 시작하는 데다 그마저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거든요.
영화라는 분야에서 좀비는 생각보다 다양한 용도로 소비됩니다. 장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쓰는 것이 정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외에 액션에서 더미로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인간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어 폭력의 쾌감은 충족하면서도 윤리적인 문제는 철저히 제거된 존재이기 때문이죠. 이를 테면 루벤 플래셔의 <좀비 랜드>와 같은 작품들을 볼 때면 공포스럽기는커녕 좀비가 불쌍해질 지경이니까요. 아니면 느리고 둔하고 어리석다는 설정을 과장해 대놓고 코미디로 풀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애드가 라이트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죠.
반면 좀 100에서의 좀비는 말씀드린 호러, 액션, 코미디 모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다시피 전혀 관객을 무섭게 하지 못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좀비를 갈아버리는 액션의 재미도 전혀 기대할 수 없죠. 좀비를 활용한 코미디가 강력하냐 하면 그러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작품에서의 좀비는 그 자체로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고 덮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구체화이자, 주인공 무리의 성장을 요구하고 독려하는 통제된 시련에 가깝습니다.
# 3.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환경 위로, 청춘물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갑니다. 달리기, 자전거, 오토바이, 캠핑카로 이어지는 운동성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입니다. 점점 더 편리하고 빠른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일련의 발전에 강력한 긍정성을 더하고 있고, 이는 주인공의 버킷리스트가 말초적인 것에서 인생을 관통하는 거시적 목표로 수정되는 과정으로 다시 연결됩니다.
늦음이라는 코드 역시 중요합니다. 지각을 걱정하는 주인공으로 영화가 시작한다거나, 동경하던 선배를 향한 고백이 한 끗 늦었다는 설정, 도움을 약속한 부부가 사라진 빈집 따위는 청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메시지의 반복임에 분명하죠. 부제에 달린 '전에'라는 말 역시 일련의 시간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증명합니다.
말인즉, 갑작스레 시한부가 된 누군가가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류의 드라마들과 거의 유사한 작품이라는 건데요. 시한부라는 설정을 좀비 아포칼립스로 변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단점입니다. 몇몇의 말초적 장르 표현 외에 이야기의 구조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아쉽다 해야겠죠.
# 4.
좀비라는 환경과 청춘물의 서사 위로 특유의 양판소식 클리셰가 무더기로 쏟아집니다.
겁나 잘생겼지만 숙맥인 가운데 마냥 천진난만하기만 한 긍정의 화신인 주인공, 인기 많고 말발 좋고 뺀질거리지만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날라리 절친, 사연을 숨기고 있는 듯 시니컬하면서 못하는 것 없이 유능한 가운데 순간순간 귀여움 포인트를 노출하는 팔망미인 여주의 구도는 상투적이고요. 허구한 날 호카게가 될 거라 말하던 나루토처럼 "차라리 좀비에게 먹히고 말지!"라는 나름의 신조를 호기로운 표정으로 외치는 장면도 애니메 갬성의 클리셰라 할 수 있죠.
좀비물로서 봐도 진부한 클리셰는 충분히 많습니다. 안전가옥으로 아슬아슬하게 도주하지만 개중 한 명은 좀비에 감염되어 있다던지, 태만하게 술 마시고 춤추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좀비에 감염된다던지 하는 장면은 대표적이고요. 혼자서는 못 열고 둘이서도 못 열지만 셋이서 열어야 열리는 셔터 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마지막 스테이지에 다다르면 좀비로 욕망을 채우는 '좀비보다 무서운 인간'이 최종보스로 등장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자신이 다루던 좀비에 의해 망신 당하는 결말도 그러합니다. 어차피 영화는 끝났고 이후는 모르겠다는 식의, 뻥 뚫린 도로 위 차 타고 쌩쌩 달리며 끝나는 태만한 앤딩도 클리셰라면 클리셰라 할 수 있겠죠.
일련의 클리셰들을 보다 보면 소위 '죽이려고 만든 캐릭터'와 '어차피 죽지 않을 캐릭터'가 직관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는 데요. 그 순간 좀비물로서의 장르적 재미는 사실상 망한 거라 봐도 무방합니다.
# 5.
구조적으로 본다면 영화는 주인공이 두 번 이기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텐도가 이겨야 할 사상적 대척점은 물론 '시즈카'와 '코스기 팀장'이죠.
시즈카는 자신의 안녕을 최우선하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는, 이를테면 고전적 개인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텐도는 개인이란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함께 할 때 온전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현대적인 수정 개인주의자라 할 수 있죠. 버킷리스트라는 아이템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직시하는 개인주의자라는 것을 상징합니다만,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를테면 스튜어디스와의 데이트, 셋이서 떠나는 전국일주)라는 면에서 공동체주의에 우호적인 인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결말에서 시즈카가 텐도의 버킷리스트에 자신의 꿈을 옮겨 적었는 점, 특히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의사)을 결정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적인 의미가 함께 담겨있는 결말이라 할 수 있겠죠.
반면 코스기 팀장은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개인이 복무해야 한다 생각하는, 전형적인 전체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텐도는 말씀드린 것과 같이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건강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공동체주의자라 할 수 있죠. 마린 파라다이스 수족관이라는 공간은 전체주의가 보장하는 안전을, 주인공의 캠핑카는 공동체주의가 선사하는 자유를 대조합니다. 시즈카는 '구원'하고 코스기는 '배제'한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수정 개인주의에 기반한 공동체주의자에게 고전적 개인주의자는 얼마든지 포용가능한 사람들이지만 전체주의자는 단호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좀비라는 코드는 버킷리스트 영화 속 예측불가능한 죽음의 구체화뿐 아니라, 전체주의에 종속되어 버린 불평불만 없는 노동력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일련의 구조적 메시지는 당연하게도 일본 사회 전체를 우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할 수 있을 텐데요. 이를 냉정하게 '블랙기업'이라 선언한다는 면에서 도발적인 작품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의 스트레스가 임계에 도달한 사람들이 굳건해 보이던 전체주의 요새를 안에서부터 붕괴시킬 것이라는 경고는 분명 서늘한 맛이 있고요,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말하는 사람이 슈퍼히어로라는 아이러니 역시 마냥 웃을 수 없게 만드는 페이소스로 승화됩니다.
# 6.
다만 작품의 정체성과도 같을 일련의 메시지 역시 과도하게 도식적이고 깊이가 얕다는 한계는 분명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결말은 자칫 공동체주의가 아닌, 아나키즘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죠.
클리셰가 과도하게 많다 지적하긴 했습니다만 막판에 가면 그래도 미친 짓을 조금 하기는 합니다. 다리 달린 좀비상어라거나, 갑자기 분위기 전대물이라거나, 슈트 입고 나타난 주인공이 가면 라이더 발차기를 하는 장면이라거나, 건전지로 상어 뚝배기를 날리는 앤딩 등은 미친놈인가 싶어 웃음을 자아내긴 하는데요. 그럼에도 이 감성이 그 자체로 피곤하다는 점만큼은 끝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이시다 유스케 감독, <좀 100: 좀비가 되기 전에 하고 싶은 100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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