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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가웨인 교향곡 _ 그린 나이트, 데이빗 로워리 감독

그냥_ 2022. 1.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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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서사는 단순하지만 상징은 난해합니다. 화려하고 근사하고 근엄하긴 한데 겁나 어둡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은 관객들이 적지 않으셨을 테죠. 스스로 생각할 것을 강요하는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거나 특유의 분위기가 기호에 맞지 않는 관객에겐 혹평을 산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작품이긴 합니다. 물론 그것이 관객의 잘못이나 부족이라 탓할 수는 없습니다. 평단에서 아무리 극찬을 늘어놓았다 하더라도 영화의 주인은 언제나 관객 개개인이니까요. 혹여 말씀드린 바와 같은 작품에 거부감이 있으시다면 이 영화는 피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합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

그린 나이트 :: The Green Knight』입니다.

 

 

 

 

 

# 1.

다만 세상엔 영화를 곱씹어 보며 자기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부족하나마 지금껏 블로그를 하고 있고, 이 글 역시 마찬가지죠. 제게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감독의 전작 <고스트 스토리>가 예방주사가 되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후 리뷰를 통해 이야기하게 될 상징들에 대한 해석 중 상당 부분은 고스트 스토리를 즐기는 동안 연습한 것에 도움받은 것들이었죠. 두 작품 모두 '삶의 가치와 죽음의 의미'라는 비슷한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거든요.

 

# 2.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전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아니, 작품'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 누구나 냉장고엔 먹다 남은 트러플이라도 있는 것마냥 당연하다는 듯 아서왕 전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만 세상엔 저처럼 '아서왕과 원택의 기사'와 '달타냥과 삼총사'를 마구잡이로 헷갈려하는 무식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그린 나이트? 제가 아는 건 신동엽이 켰던 그린 라이트 뿐인데요.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설을 몰라도 영화를 따라가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무식한 놈의 합리화가 아니라 감독부터가 전설 말고 자신의 '영화'를 즐겨달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끝내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선언적입니다. 여러 가지 상징과 그 상징을 투사한 시련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는 영웅 서사라는 것만 이해하셔도 충분합니다. 들어가기 앞서 적당히 정리해 봅시다. 인물은 가웨인, 엄마, 왕, 원탁의 기사, 에셀, 녹색 기사, 강도, 머리 잘린 유령, 거인, 버틸락 경, 버틸락 부인, 눈을 가린 노파 정도가 등장합니다. 오브제는 왕관, 녹색 허리띠, 도끼, 여우, 머리, 자연 정도가 유의미해 보이는군요. 영화의 난해함은 개중 몇 가지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이후는 제 나름의 견해를 이야기하려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부분적으로 감독의 의도와 같을 수도 있지만 상당 부분에서 다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의 리뷰들에서 단호하게 밝히는 바와 같이 그저 이 영화를 이렇게 본 사람도 한 명쯤 있구나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_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감독

# 0. 기억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 보이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데이빗 로워리' 감독, 『고스트 스토리 :: A Ghost Story』입니다. # 1. <그린 나이트>를 보려고 했는데요. 감독

morgosound.tistory.com

 

 

 

 

 

# 3.

주인공 가웨인입니다. 물이 끼얹어지는 모습, 숨이 터지는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유곽에서 아침을 맞은 철없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작품의 테마를 생각할 때 그 시작을 탄생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썩 자연스럽죠. 가웨인은 장성한 사람입니다. 영화의 시작을 인물의 탄생이라 이해한다면 이전까지의 시간은 삶이 아니라 말하는 셈이 됩니다. 쾌락과 목숨만 존재하는 시간은 살아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역으로 쾌락과 목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힌트군요.

 

서사는 영웅 가웨인의 모험으로 요약되지만 정작 가웨인은 영웅적 인물이 아닙니다. 유약하고 세속적이며 무엇보다 비겁하죠. 초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화를 지배하는 무수히 많은 시련과 거래에 있어 전혀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과 원탁의 기사라는 든든한 비호 앞에선 큰 날의 도끼를 휘둘러 녹색 기사를 참수하지만, 혼자 내던져진 이후로는 시종일관 비굴합니다. 자신을 도와준 강도의 선의에 헐값을 매겼다가 혼쭐이 납니다. 한이 서린 유령의 도움엔 흥정을 하죠. 먼저 길을 걸었던 거인들에게 염치없이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다 대차게 까이구요.

 

'강도'와 '유령'과 '거인'의 존재는 가웨인의 도덕성을 들추는 것 외에도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강도는 대화에서부터 드러나듯 물욕적이고 세속적인 인물입니다. 모욕에 못 이겨 가웨인을 공격하고 물욕에 눈멀어 강도를 감행하고 공명심에 취해 도끼를 뺏어 들죠. 녹색 기사를 찾아간 강도가 살아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건 무리일 텐데요. 강도의 죽음은 현실적 욕망에 의한 죽음, 가웨인의 첫 번째 죽음과 연결됩니다. 유령은 머리를 찾고 있습니다. 머리를 찾는다 해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붉은 호수 아래 가라앉은 머리를 찾자 유령은 안식을 찾습니다. 유령이 남긴 '잘린 머리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라는 화두는 가웨인의 두 번째 죽음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거인은 위대한 업적을 먼저 걸어간 누군가들의 자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인상적인 것은 살아서 목이 떨어졌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들에겐 머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기사를 내려다보던 거인은 어깨에 태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합니다. 가웨인이 거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 함을, 그러기 위해선 홀로 모험을 이겨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죽음에서 녹색 허리띠를 풀어놓은 가웨인은 참수당하지만 머리가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가웨인은 거인이 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죠.

 

 

 

 

 

 

# 4.

 

잠시 결말로 건너뛰어 볼까요. 가로막는 여우를 뿌리치고 녹색 기사에 다다른 가웨인. 깊은 잠에 든 듯한 기사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씬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기다림은 사실 기여하는 바가 없습니다. 누군가 나타날 시간이 필요한 것도 조바심을 느낄 이유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감독은 이례적일 정도로 긴 시간을 투자합니다. 가웨인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보다 정확히는 관객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녹색 기사의 모습을 한 '죽음' 앞에서 가웨인은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되짚었을 겁니다. 관객은 유곽 이전의 가웨인을 모르니까요. 강도를 통해 명예욕과 공명심의 허무함을 느꼈을 겁니다. 유령을 통해 내 머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고민했을 테죠. 거인을 통해 오롯이 홀로 설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들의 위대한 걸음에 합류하고 싶다는 내면의 의지를 발견했을 겁니다. 결말에서 도망쳐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녹색 허리띠를 풀고 참수되는 것은 이전의 여정이 낳은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수순에 불과합니다.

 

버틸락 성은 마지막 선택을 앞둔 가웨인이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이상적 안락입니다. 개인적으론 이 공간 전체는 '부인을 통해 녹색 허리띠를 돌려준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이전까지 여정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메타포와 뉘앙스로 일관하던 작품에서 관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감독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라고 말이죠. <고스트 스토리>로 친다면 플롯과 분리된 별개의 캐릭터인 예언자를 등장시켜 수다스러운 대사들로 작품의 맥을 짚어주던 대목에 직접적으로 대응된달까요.

 

상처를 입지 않는다 정도로 은유되던 녹색 허리띠에 조금 더 노골적인 쾌락의 성격을 더한다거나, 녹색 기사와의 마지막 선택에 앞서 이를 은유하는 하트 모양 책을 들려준다거나, 구태여 에셀 역의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버틸락 부인으로 세운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특히나 이전까지 영화의 톤과 다른 식당에서의 수다스러운 대화를 통해 '녹색'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말로 풀어놓는 건 노골적입니다.

 

 

 

 

 

 

# 5.

엄마 '모건 르 페이'와 여우, 그리고 노파입니다. 엄마는 마법을 부려 녹색 기사를 만듭니다. 어찌 보면 가웨인과 녹색 기사는 같은 엄마를 둔 형제인 셈인데요. 때문에 영화는 범지구적 존재인 요정이 낳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바라 볼 여지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목을 베자 자연이 인간의 목을 베는 이야기라고 말이죠. 다만 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글이 너무 지저분해질 듯 하니 적당히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엄마가 녹색 기사를 만든 이유는 아들 가웨인에게 영웅적 모험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가웨인의 모험이 엄마의 의도였고 여우가 시종일관 길잡이 노릇을 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특히 마지막 죽음을 앞둔 가웨인을 막아 세우며 직접 말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엄마와 여우는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없는 버틸락 성의 노파에게서 전달받을 수 있는 정보는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영화 내내 마찬가지의 흰 천으로 눈을 가리는 존재는 도입의 모건 르 페이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노파 역시 엄마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죠.

 

관련의 정도는 상상하기 나름입니다. 그린 나이트를 만들었듯 여우와 노파를 만들어 아들의 여정을 지켜보는 전령으로 보냈다 이해하셔도 좋구요. 아니면 스스로 변신해 아들을 따라다녔다 봐도 무방합니다. 관객 각자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상상하면 될 테죠. 개인적으론 전령이라는 해석이 조금 더 마음에 드는 편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모건 르 페이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듯한 느낌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죠.

 

엄마는 전능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녹색 기사를 만들고, 아들이 녹색 기사의 게임을 받아들일 것을 예측 혹은 도모하고, 녹색 허리띠를 만들고, 노파나 여우 등을 통해 아들의 여정을 보살피는 인물이죠. 원작 전설에서는 버틸락 경과 녹색 기사는 동일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습니다만, 강도가 훔쳐간 녹색 허리띠를 버틸락 부인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원작의 설정을 이어왔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우라 돌격하는 강도를 원콤 낸 녹색 기사(=버틸락 경)가 녹색 허리띠를 아내에게 쥐어주며 가웨인에게 돌려줘라 말했다 보는 편이, 녹색 허리띠가 공산품이라 여러 개 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높을 테니까요. 여하튼 버틸락 경이 곧 녹색 기사라면 버틸락 부인 역시 모건 르 페이가 만들어 낸 것이고, 그들의 아름다운 성 역시 모조리 모건 르 페이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겠죠.

 

여우가 말을 했다는 것은 이런 전지전능한 존재의 평정심이 흔들렸음을 의미합니다. 아들을 신화적 존재로 만들고 싶지만 정작 죽음에 다다르자 흔들리고 마는 모정의 발현인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직접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그린 나이트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없앨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도 못하죠. 가웨인의 죽음은 모건 르 페이에게 있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들을 위한 최선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일련의 죽음의 의미는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 6.

영화 스스로 말하듯 녹색은 자연과 부패를 상징합니다. 부패한다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모되고 변질되어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작 <고스트 스토리> 식으로 말하자면 과학적 순리인 셈이죠. 허리띠는 묶는 물건입니다. 녹색에 대한 저항이자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의 구체화죠. 버틸락 부인이 가웨인에게 녹색 허리띠를 쥐어주는 장면은 사실상 베드신과 같이 묘사되는데요. 녹색 허리띠를 넘겨받은 가웨인의 손에 묻은 탁한 액체는 정액의 은유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성욕과 쾌락은 녹색 허리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망각입니다. 빈 집에서 홀로 남아 누구를 기다리는 지도 잊어버린 고스트, 집시를 집어던지던 C의 유령과 같죠.

 

녹색 기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한 해결하고 가야겠죠. 저는 All & Nothing.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가웨인이 거쳐온 모든 여정의 총합이자 그 여정을 지나오며 스스로의 이야기로 완성된 가웨인 자신, 그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비어있는 존재라는 뜻이죠.

 

말이 쓸데없이 어려울까요? 쉽게 절간의 불상을 떠올리시면 편리할 겁니다. 스님들은 매일 꼭두새벽 같이 일어나 불상을 닦고 절을 올리지만 이는 불상에 투영된 자신의 불심을 닦는 것이지 진짜 쇳덩어리를 모시는 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달마야 놀자>에서 떨어진 불상의 귀를 보며 호들갑 떨던 스님들에게 호통을 치던 노스님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네요. 노스님에게 부처님의 귀라며 호들갑을 떨던 스님들의 모습은 녹색 기사의 서슬 퍼런 도끼에 벌벌 떨며 달아나던 가웨인처럼 어리석어 보였을 겁니다.

 

드디어 결말입니다. 녹색 기사 앞에 도착한 가웨인의 고뇌와 두 개의 죽음이 나열됩니다. 하나는 비굴하게 도망쳐 녹색 허리띠의 마법에 힘입어 영광을 누리다 왕국의 멸망을 목격하며 죽는 서사입니다. 대사 한마디 없이 웅장하고 비장하게 전개되는 맛이 일품인 연출이었죠. 두 번째는 녹색 허리띠를 풀어놓고 당장 참수당하는 결말입니다. 짐짓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둘은 ⑴ 허리띠를 풀었다. ⑵ 머리가 떨어진다. 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어디에 잘린 머리가 떨어지느냐만 다를 뿐이죠.

 

홀로 쓸쓸하게 죽어가던 첫 번째 결말과 달리 두 번째 결말에서만큼은 녹색 기사가 가웨인의 얼굴을 애정으로 쓰다듬으며 용기 있는 기사라 칭찬합니다. 시종일관 비겁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것과, 첫 번째 최후의 노골적이고 쓸쓸한 묘사를 생각한다면 두 번째 결말은 해피 엔딩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 같은 결말은 일반적으로 비굴하게 살아서 죽는 것 대신 명예롭게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되는 선택이라는 식으로 해석되기 마련입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웨인이라는 이름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영웅의 위대함에 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장르물이랄까요. 하지만 이 견해 하에서라면 구태여 여우를 떼어놓으면서까지 가웨인의 최후를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한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린 나이트라는 글귀를 단단한 돌이 아니라 나무 밑동에 새겨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해 사라져 버릴 곳에 글귀를 새겨둔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라는 생각입니다.

 

 

 

 



# 7.

 

녹색 허리띠를 벗어던진 가웨인은 몰락한 나라의 왕이 된 가웨인에 비해 훨씬 오래도록 남을 테지만 그래 봐야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역시 필연적으로 잊혀 사라질 겁니다. 그럼에도 가웨인은 당당히 죽음을 마주하죠. 가웨인의 선택은 전설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으로서의 '기사 다움'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죽느냐라는 건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길이길이 남는 전설이 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기사답게 죽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더 고독하지만 그래서 더 숭고하죠.

모험을 떠나기 전의 가웨인이라는 '소리'가 모건 르 페이라는 음악가가 배치한 그린 나이트라는 악보를 만나 가웨인의 전설이라는 '교향곡'이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끝은 죽음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여정에 비겁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마지막 가웨인의 용기는 누구도 알지 못할 테지만 역시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웨인의 여정과 끝이 이렇게나 치열하고 아름답고 용기 있고 위대했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실천은 평가받기 위해서라거나 살아남기 위해서라거나 기억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숭고하기 때문이죠. 위와 같은 해석은 <고스트 스토리>에서부터 이어져오는 능동적 허무주의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일련의 결말은 자칫 형이상학적 가치의 실천이라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데요. 감독의 의도가 그곳에 있지 않음은 첫 번째 결말에서 '에셀'을 처참하게 버리도록 한다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눈부시고 순수하게 묘사하던 에셀과의 사랑을 말이죠. 영화는 개인의 사랑과 쾌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되려 개인적 쾌락을 터부시 하는 기사 정신이라는 말리 치장된 권력욕에 대한 통렬한 비난에 가깝습니다.

 

사족을 살짝 달아보자면, 개인적으로 가웨인이 녹색 기사에게서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간 후 기사 작위를 포기하고 에셀과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녹색 허리띠를 풀었다 하더라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상상합니다. 기존의 두 결말을 각기 다른 '기사 정신의 죽음'이라 한다면, 기사가 아닌 에셀과의 사랑을 택한 가웨인은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 8.

 

다만 여기까지는 그저 메시지일 뿐이다. 철학적 메시지를 주장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전보를 치는 것이 훨씬 적합하죠. 감독은 감상을 위한 매체인 영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한 이유를 설득해야 합니다. 전작 <고스트 스토리>의 가치는 '우리는 왜 어차피 사라질 텐데도 불구하고 음악을 하고 영화를 하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History를 만들어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어차피 피하지 못할 멸망이라면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라는 대답보다 '그렇게 쌓아온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나 눈부시지 않나.'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의의라는 것 역시 감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의 설파가 아니라, 일련의 가치를 투영한 '가웨인이라는 비겁한 인격의 모험을 근사한 영웅의 서사로서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데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온갖 논리적이고 문학적인 해석을 돌고 돌아 영화를 가득 메운 웅장함과 근엄함과 마지막 가웨인의 죽음에서 전달되는 숭고함이야 말로 영화의 본질이라는 뜻이죠. 데이빗 로워리 감독, <그린 나이트>였습니다.

 

# 9. 

 

앤딩 크레디트를 끝까지 본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쿠키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왕관을 쓰는 모습이죠. 가웨인의 스토리는 여기서 끝날 테지만 그럼에도 다음의 누군가가 기꺼이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자신의 길을 걸을 겁니다. History 입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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