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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추악한 리얼리즘 _ 택시, 자파르 파나히 감독

그냥_ 2021. 10. 2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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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었다. 고민 끝에 택시를 몰아야겠다 생각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택시 :: Taxi』입니다.

 

 

 

 

 

# 1.

 

첫 번째 손님입니다. 강경한 법 적용을 주장하는 남자와 죄와 벌의 등가성에 대해 주장하는 여자입니다. 대화 내내 남자는 앞 좌석에 여자는 뒷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화면의 정중앙에 여자는 귀퉁이에 위치합니다. 남자는 편안한 일상복을 여자는 차도르를 두르고 있습니다. 남자는 대화 내내 앞이나 옆자리 남자 운전사만을 쳐다봅니다. 여자은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합니다. 두 사람은 짐짓 같은 주제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위계에 존재합니다.

 

여자는 교사입니다. 여자의 직업을 들은 남자는 말합니다. "그럼 그렇지. 현실과 동떨어진 일을 하시네. 책 속에 파묻혀 애들만 상대하고 사니 그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놓지!" 직전까지 없이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 소리쳐 말하던 남자는 자신을 노상강도라 소개합니다. 자신은 교사나 택시 기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은 털지 않는다 말합니다. 도덕성과 경제 수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강력한 공권력에 의한 통제를 옹호하는 아이러니. 선생님이 택시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먼저 내린 노상강도는 창 너머 뒤로 밀려납니다.

 

여자 손님이 내린 후. 운전기사의 얼굴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감독 "자파르 파나히"입니다.

 

 

 

 

 

 

# 2.

 

두 번째 손님입니다. 오토바이 사고가 발생했나 봅니다. 크게 다친 남자와 오열하는 여자입니다. 둘은 부부입니다. 남편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언을 남기려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아내는 상속을 받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겁니다. 이슬람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죠. 남편은 유산이 형제들이 아닌 아내에게 전달되길 바랍니다. 유산에 대한 내용이 담긴 유언은 감독의 스마트폰에 촬영됩니다. 아내는 목 놓아 오열합니다. 

 

병원에 도착합니다. 남편은 병원으로 들어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옵니다. 아내군요. 아내는 남편의 유언이 담긴 영상을 보내달라 말합니다. 곧 보내주겠다는 감독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보채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의 전화로 보내지 말고 자신에게 보내달라 말합니다. 남편이 무사하냐는 감독의 물음에 아내는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직전까지 남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아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 사무적입니다. 서늘하죠. 이때의 서늘함은 아내 개인의 것은 아닙니다. 불합리한 사회 제도의 것이죠.

 

# 3.

 

세 번째 손님입니다. 영화감독 지망생입니다. 이 손님이 타는 동안은 택시가 멈춰서 있습니다. 이란의 영화는 멈춰있기 때문이죠. 우연히 맞닥뜨린 거장 '자파르 파나히'에게 상업 영화보다 예술 영화를 좋아한다는 새내기가 질문합니다.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감독은 대답합니다. 영화나 책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소재는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나에게도 소재를 찾는 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이다. 라고 말이죠.

 

감독에게 있어 적극적으로 영화를 찾아 나서는 용기는 참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다못해 택시를 몰아보는 것도 썩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 부분은 감독 개인의 영화관과,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동료 영화인들에 대한 비판을 슬쩍 내비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네요.

 

# 4.

 

네 번째 손님입니다. 두 할머니가 어항 속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다급히 택시를 잡습니다. 12시까지 알리의 샘이라는 곳에 물고기 두 마리를 풀어주고 새로운 물고기를 잡아야 한답니다. 둘 모두 정오에 태어났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군요. 미신입니다. 2000년 하고도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이런 통속적인 미신을 진심으로 신봉합니다. 이곳은 '파나히'의 이란입니다.

 

 

 

 

 

 

# 5.

 

다섯 번째 손님입니다. 하굣길에 삼촌을 기다리는 감독의 조카 '하나'군요. 과일주스보다는 프라푸치노를 좋아하는 당찬 딸아이입니다. 소녀는 수다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며 호기심에 충만하고 똘똘합니다. 카메라로 사람들을 촬영하던 감독을 되려 카메라로 촬영하는 유일한 존재죠. 조카는 카메라로 삼촌을 촬영하며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적어도 이 순간 감독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영화는 학교 축제에 상영될 겁니다. 이란에선 영화를 배급할 수도 상영할 수도 없는 삼촌의 처지와는 대조적이죠.

 

조카의 존재는 영화의 병렬적 구조를 일거에 뒤흔듭니다. 관찰자적 시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택시기사 삼촌을 사회 안의 존재로 떨어트립니다. 이런 위상의 변화는 감독을 관찰자이기 이전에 책임을 공유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읽히게 만드는 겸허한 연출이면서 동시에, 관객 역시 어린 '하나' 감독보다 낮은 차원의 영화 속 존재로 개입하게 합니다. 매력적인 구성이군요.

 

친구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삼촌이 잠시 내립니다. 택시 안에 거치된 카메라에만 의존하던 화면은 처음으로 조카의 카메라로 옮겨갑니다. 조카가 찍은 화면은 핸드헬드인 탓에 다소 위태롭지만 그래도 제법 근사한 구도입니다.

 

 

 

 

 

 

# 6.

 

여섯 번째 손님입니다. 앞서 감독이 인사를 나눈 친구 '아라쉬'입니다. 친구는 영상을 하나 보여주는데요. 저런, 강도를 당했나 보군요. 친구는 강도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전히 강도와 함께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마 신고하진 못 한다 말합니다. 그랬다간 그 사람들이 처형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화가 나긴 하지만 그들이 죽을 만큼 잘못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합니다. 극단적 엄벌주의의 맹점이죠.

 

불쑥 누군가가 나타나 오렌지 주스를 건넵니다. '아라쉬'는 저 사람이 그 강도라 말합니다. '파나히' 감독은 강도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겼냐는 감독의 물음에 '아라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라 답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지는 건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너와 나의 이야기입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카는 자리를 비웁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엔 부끄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 7.

 

다시 조카입니다. 조카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선생님이 일러준 이란의 영화 지침을 읽습니다.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고 따뜻하게만 조카를 바라보던 감독은 심각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합니다.

 

이란에서 배급할 만한 영화를 만들려면 다음의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1. 이슬람 두건을 준수하라.

2. 남녀 간 접촉을 삼가라.

3. 추악한 리얼리즘을 피하라.

4. 폭력을 피하라.

5. 좋은 사람한테는 넥타이 사용을 피하라.

6. 좋은 사람한테는 이란 이름을 쓰지 마라. 대신 이슬람 성인들의 신성한 이름을 붙여라.

7.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슈를 다루지 마라.

 

소녀는 말의 끝에 선생님의 당부라며 다음의 말을 붙입니다. "우리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대요.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알아서 비판을 하라고요. 여러분이 더 잘 알죠. 그랬어요." 영화 택시는 위의 지침을 의식적으로 모조리 어기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있고,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알아서 비판하고 있으며, 다른 누구보다 이란을 잘 아는 사람의 영화죠. 중립적이고 온화한 톤의 감독조차 차마 참지 못하는 문제의식과 분노를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 8.

 

삼촌은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영화의 메가폰은 온전히 조카에게로 넘어갑니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보이구요. 그 앞을 쓰레기 줍는 소년이 지나는군요. 소년은 신랑이 떨어트린 돈을 챙깁니다. 소녀의 지적에 소년은 카메라를 끌 것을 요구합니다. 비슷한 나이의 소년과 소녀는 전혀 다른 도덕관을 가진 채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가른 건 경제적 처지와 교육이죠. 소녀의 설득에 소년은 용기 내 신랑에게 돈을 돌려주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결국 돌려주는 데 실패합니다. 어린 소년과 소녀의 논쟁은 신혼부부를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부는 곧 아이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 아이는 소년의 삶을 살게 될까요. 소녀의 삶을 살게 될까요.

 

'하나'의 단편 영화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택시로 돌아온 감독은 조카의 영화를 영영 모를 테죠. 이란에서 지침을 어긴 '하나' 감독의 영화는 상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카는 자신의 결과물을 상영할 수 없음에 분노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지막까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년의 모습을 촬영하며 작품을 완성합니다. 영화감독은 상영할 수 없는 영화라도 완성 짓는 사람입니다. 이여야 합니다.

 

 

 

 

 

 

# 9.

 

마지막 일곱 번째 손님입니다. 장미 꽃다발을 든 손님입니다. 이미 감독과 일면식이 있는 듯한 손님은 갓 출소한 죄수나 갓 수감된 사람의 가족을 방문하러 가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어딜 가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천국에 간다 답합니다. 교도소가 천국이라면, 교도소 밖은 어디인 걸까요.

 

'곤체 가바미'. 남자 배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체포된 이란 여성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녀는 경기를 보지도 못한 채 경기장 밖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경기를 보는 행위가 아니라 보려는 의도를 미리 처벌할 정도로 강력한 통제사회입니다. 그녀는 열흘째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국의 그녀의 단식을 막는 대신 "나는 단식 투쟁을 하지 않았다"라는 증언을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란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미 꽃다발을 든 손님은 인권 변호사 '나스린 소토우데'입니다. 감독의 의도를 금세 꿰뚫어 본 변호사는 영화를 만들고 볼 모든 영화인들에게 탐스러운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넵니다. 변호사는 추악한 리얼리즘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슬람 지도부가 사람들을 핍박하는 방식을 토로합니다. 변호사는 감독의 안위를 위해 이 대목은 영화에 내지 않는 편이 좋겠다 말합니다.

 

감독은 그 말까지 모조리 영화에 담아냅니다.

 

 

 

 

 

 

# 10.

 

조카는 질문합니다. 추악한 리얼리즘이 무엇인가요. 소녀의 질문은 감독이 아닌 영화를 보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합니다. 조카는 꽃 한 송이를 최대한 큼지막하게 화면에 담은 후 차에 다소곳이 올려놓습니다. 옆으로 길게 누은 장미꽃이 엄숙하고 경건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영화 내내 인물을 중심으로 담던 카메라는 사회의 모습을 담담히 담습니다. 무수히 많은 차량과 골목길을 지나 택시는 볼라드 앞에 멈춰 섭니다. 감독은 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가 목적지를 발견하고 돌아옵니다. 그다음 조카와 함께 더 멀리 나아갑니다. 빈 택시 앞을 히잡을 쓴 여인들이 가로지릅니다. 차를 비우기 무섭게 오토바이를 탄 강도가 택시를 텁니다. 마지막 1분이 이 작품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슬람 지도부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것. 추악한 리얼리즘이기 때문이죠. 삼촌은 어른다운 방식으로, 영화감독다운 방식으로, 용기 있는 자의 방식으로 조카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 11. 

 

영화는 끝이 났지만 앤딩 크레디트는 없습니다. 크레디트를 붙이려면 이슬람 지도부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녀가 자신의 영화를 마무리 지은 것처럼 크레디트만 없을 뿐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지원으로 영화는 완성되어 지금처럼 관객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게 중요하죠.

 

좋은 감독은 단순한 상황, 제한적 여건에서도 이야기와 인물과 사회와 이들 모두를 품은 메시지를 밀도 있게 생산합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택시의 생활 밀착성과, 운전이라는 행위의 본질적 전진성, 블랙박스가 가지는 신뢰성에 효과적으로 연결합니다. 동시에 작품을 택시를 운전하는 본편과 '하나'가 촬영한 단편과 마지막 차량 강도의 단편으로 분리해 시퀀스에 볼륨과 완급까지 부여합니다.

 

영화 <택시>의 가치는 단순한 감독의 저항정신이 아닙니다. 저항의 수단으로 한순간 흩어져 사라질 일장연설 대신 예술을 선택했다는 점과, 이런 투쟁적 목적이 뚜렷한 작품에서조차 한치의 완성도도 양보하지 않은 장인정신이죠. 이란에서 촬영이 금지된 감독의 상영이 금지된 이 영화는 제65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합니다. 정작 감독은 출국 금지조치로 인해 영화제에 불참하게 됩니다. 불과 2015년의 일이었습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택시>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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