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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기시감 _ 방언, 구문걸 감독

그냥_ 2021. 2.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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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2025년 홍콩, 중국 표준어(보통화, 普通话)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기사의 택시는 '보통화 불가능'을 뜻하는 하늘색 딱지를 붙여야만 합니다. 보통화를 구사하지 못하는 기사는 공항과 여객 터미널 같은 출입국 관리 지점에서 승객을 태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중환과 진중, 군통 상업 지구에서의 영업이 금지됩니다. 

 

제35회 홍콩영화 금상장 작품상 수상작 <10년>의 세 번째 단편입니다.

 

 

 

 

 

 

 

 

'구문걸' 감독,

『방언 :: DIALECT』입니다.

 

 

 

 

 

# 1.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짧은 단편이자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단편입니다. 나름의 미장센이 두드러지는 작가주의적 성향의 여타 작품들에 반해 영화 <방언>은 명쾌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전력을 다합니다. 일본의 <10년> 프로젝트 세 번째 작품이었던 '츠노 메구미' 감독의 영화 <데이터>에 정확히 대응한다 할 수 있겠네요.

 

# 2.

 

'구문걸' 감독이 상상한 10년 후는 언어적 식민 상태에 놓인 홍콩입니다. 영국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차별받던 홍콩 사람들은 중국 반환 후 보통화를 구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따라 다시금 차별받는 현실에 놓이고 맙니다. 감독은 보통화를 쓰지 못하는 택시기사 '아한'이 겪은 하루를 통해 다양한 순간에서 홍콩의 사람들이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고통을 수집합니다. 거대한 한 번의 비극은 혹여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라면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상을 스며드는 단발적 사건들의 반복 앞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통화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압박은 경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공권력을 동원한 물리적 폭력은 공포와 분노를 부르지만 경제적 폭력은 자조적 절망과 무기력함을 부르는 법이죠. '아한'은 보통어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제대로 승객을 태우지 못합니다. 간신히 보통어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택시를 잡지 못한 한 승객을 태우는 데 성공하지만, 무려 <광둥어를 쓰는 손님을 태운 죄>로 하루치 일당만큼의 벌금을 내야만 했죠. 

 

 

 

 

 

 

# 3.

 

금지구역에서 손님을 태운 '아한'을, 보통화를 쓰는 내지인 출신 택시기사가 신고합니다. '아한'의 "우린 같은 동포이지 않느냐"라는 말은 경쟁적 경제 논리 앞에 가볍게 무시됩니다. 홍콩에서도 보통화를 써야 한다는 정책의 명분이 <내지인이나, 홍콩인이나 모두 같은 동포다>라는 데 있다는 점을 조롱하는 대목이죠.

 

신고를 받고 나타난 경찰은 '아한'의 한 번만 봐달라는 비루한 부탁 앞에 "누군가는 법을 어겼잖아요."라 답합니다. 이 상황에서 법을 어긴 사람은 금지구역에서 승객을 태운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아한'이 아니라, 광둥어를 쓴 누군가를 뜻하는 보통명사입니다. 제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하더라도 일련의 정책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언어를 말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딱지를 떼는 경찰에게 '아한'이 "광둥어를 쓰는 것이 범죄냐" 소리치는 순간, 여객 터미널 구역에서 <판매하거나 훔치는 건 불법>이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옵니다. 2025년의 홍콩에서 광둥어를 쓰는 것은 물건을 훔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입니다.

 

# 4.

 

이전까지 합의해 쌓아 왔던 능력, 세대, 경제적 체계 따위는 모두 무기력합니다. 새롭게 정립된 언어의 계급은 다른 모든 능력을 가볍게 압도합니다. 가난한 택시기사 '아한' 뿐 아니라 말쑥한 정장을 빼입은 여자 손님 역시 보통화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해고당하긴 매한가지죠.

 

학교를 다니는 어린 아들은 아빠처럼 도태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보통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영국 사람인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을 들리는 그대로 '베컴'이라 부르지 못하고 '다웨이베이커 한무 大卫 贝克汉姆'라 부르는 아들의 아이러니가, 홍콩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풍자합니다. 겨우 한 세대만 흐르고 나면 광둥어를 쓰는 사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 5.

 

영화를 보는 내내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작품에서 본 클리셰나 아이템이어서는 아니구요. 우리나라가 겪었던 역사적 아픔들에 대한 기시감이었죠.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당연하게도 일제에 의한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조선어 말살정책일 겁니다. 절대적인 폭력 우위를 확보한 대집단이, 소집단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정체성을 지우고 흡수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언어를 말살하는 식의 접근법은 두 사안 모두 정확히 동일합니다.

 

두 번째는 다소 뜬금없게 들리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88 올림픽을 앞두고 이루어졌던 도시정비사업에 대한 기시감이었습니다. 독재 국가의 정치적 목적 하에 폭압적으로 시행되는 정책으로 인해 사람들은 넘어설 수 없는 두 계급으로 분화되고. 그중 하층을 구성하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가운데, 폭력의 주체이자 수혜의 대상에, 비단 국가권력뿐 아니라 상위 계층의 공동체 구성원도 포함되어 있는 대립적 상황이 닮은 바가 있기 때문이죠.

 

경찰을 부르는 내지인 택시 기사 뒤로 개발 수혜를 봤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자리를 잃고 내몰리는 '아한'의 모습에서 재개발로 인해 떠밀려 나야 했던 서울 빈곤층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 6.

 

냉정하게 말해서 작품 자체의 특별한 성취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네 번째 단락에서 말씀드린 경찰 씬에서 곱씹을 만한 대사가 있었다. 정도가 의의의 전부랄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관객이라면 누구나 느낄 역사적 기시감이 작품에 감동을 만들어 냅니다. 의도한 바는 아녔겠습니다만 얻어걸리려면 이렇게 얻어걸리기도 하는군요. '구문걸' 감독, <방언>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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