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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악행은 합리화될 수 있는가 _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

그냥_ 2020. 10.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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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테마는 선명합니다. 정당한 악행의 연쇄. 명분과 정의가 악행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죠. 영화에서 지칭하는 '사라지지 않는 악마'는 악의에 가득 찬 특별한 살인마가 아닙니다. 자기 명분에 한껏 충전되어 정의로운 악행을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시골마을 사람들의 살인사건으로 배경을 제한하고 이를 위해 기꺼이 오프닝 시퀀스를 할애한 건 이후 벌어지게 될 무수히 많은 선량한 악행들에 보편성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 The Devil All the Time』입니다.

 

 

 

 

 

# 1.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배경과 다른 동기와 다른 성격과 다른 철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만, 단 한 가지. 자기 나름의 정당함에 충전되어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작품 내내 자신만의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때론 신성하기까지 한 이유로 악행을 수행하지만, 그 악행을 정당화하는 정의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누군가의 정의로움 앞에 처단당하게 됩니다. 끊이지 않는 악행과 처단의 연쇄는 돌이킬 수 없는 개인의 파멸과 공동체의 붕괴로 귀결됩니다.

 

 

 

 

 

 

# 2.

 

파병 군인 '윌러드'는 일본군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전우 '밀러 존스'의 생명을 거둡니다. 그들 나름은 전우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선의의 행동이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전우에게 총을 겨누었던 일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 3.

 

'밀러 존스'에 대한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윌러드'. 그의 '간절히 벗어나고 싶지만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치부'는 공터에 몰래 세워진 비루한 십자가로 구체화됩니다. 자기 자신만의 교회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보다 정확히는 꿰뚫어 보아주었으면 싶은 '그분'을 불러 매일같이 구원을 갈구하지만 응답은 요원하기만 하죠. 하루하루 깊어가는 다크서클과 숨길 수 없는 폭력적인 눈빛처럼. 그는 매일같이 신실한 기도를 올리고 또 매일같이 자신을 잃어 갑니다.

 

 

 

 

 

 

# 4.

 

기도를 올리는 '윌러드'와 그의 아들 '아빈'을 모욕한 마을 사람들 역시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한 '윌러드'의 폭력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보복이었지만, 명분과 무관하게 그의 폭력적 철학은 아들 '아빈'에게 이어져 이후 벌어지게 될 비극의 연쇄를 낳게 됩니다.

 

 

 

 

 

 

# 5.

 

'윌러드'는 아내 '샬롯'을 낫게 하기 위해 신에게 바치는 희생이라는 고결한 명분 하에 아들이 아끼는 반려견 '잭'을 살해하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죽음을 막지는 못합니다. '샬롯'의 죽음이 자신이 저지른 전장에서의 악행 때문이라 생각한 '윌러드'는 결국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밀러 존스'와 '잭'과 아들 '아빈'에게 저지른 악행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 6.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해치던 보복의 날을 <아버지와 함께 한 최고의 하루로 기억했다>는 내레이션과 연이어 쓰러진 '샬롯'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출은, 이후 성장한 '아빈'이 아버지 '윌러드'와 같은 길을 걸으리라는 것과 그 결말이 비극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복선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윌러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밤, '아빈'이 붉은 핏자국과 같은 파이를 먹는 장면 역시 이 인물이 장차 피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암시로 이해할 수 있겠죠.

 

 

 

 

 

 

# 7.

 

한편. 신 앞에 자신의 운명을 시험한 '로이', '시어도어' 형제는 신앙적 믿음의 실천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치에 자신의 인생을 내던진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이 대단히 왜곡되어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신성을 위해 지불하는 자기 학대는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순수하고 또 숭고한 것이죠.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현실에서의 증명 사이의 뚜렷한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해 점점 미쳐가던 '로이'는 결국 아내 '헬렌'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 8.

 

분명 '로이'는 자신의 아내 '헬렌'을 살해했지만, 이는 그가 악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신이 신실한 자신의 부탁을 들어 아내를 부활시켜줄 것이라는 데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 뿐이죠. 하지만 동시에 아무리 나름의 신성한 목적에서 저지른 행동이라 하더라도, 아내 '헬렌'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헬렌'의 죽음은 '로이'와 결혼한 '헬렌'의 탓도, 그녀를 부활시켜주지 않은 신의 탓도 아닌 오롯이 '로이'가 스스로 선택한 본인의 책임이죠.

 

아내를 해친 후 '로이'는 마을에서 도주하게 되고,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된 '칼'과 '샌디'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을 '아내를 해친 더러운 자'라 자칭하는 대목이나 사랑하는 딸 '레노라'의 이름을 남기는 장면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 진심이나 명분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9.

 

'칼'은 <사람이 신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겠다>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매드 아티스트 기믹의 연쇄 살인마입니다. 아내이자 공범인 '샌디'의 동기는 '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명확하지만, 형제 '리'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창부라는 직업, 내면 깊은 곳에서의 고독감과 불안함 따위를 때론 자극하고, 때론 보상하기도 하는 '칼'의 겁박과 그루밍 따위의 외부적 요인 정도를 추측할 수 있겠죠.

 

 

 

 

 

 

# 10.

 

'칼'은 자신만의 종교 예술적 가치의 실천이라는 고상한 이유로 합리화된 살인을 수차례 저지르게 되고 결국 (범죄행위가 발각됨으로 인해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희생양 삼았던 모델 '아빈'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공범 '샌디'는 희생자들의 절망하는 모습에 대한 죄책감으로 신고를 하려다, 그로 인해 '칼'의 의심을 사게 된 것을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되죠. 위대한 종교 예술의 실천도, 희생자들을 동정하는 선의도. 이미 저질러진 악행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 11.

 

'아빈'의 의붓동생 '레노라'를 괴롭히던 친구 '진'과 '토미', '오빌'은 오빠 '아빈'에게 처절한 보복을 당합니다. '레노라'를 지킨다는 정의로운 명분 하에 '아빈'이 폭력을 저지르는 사이, '레노라'는 목사 '프래스턴'과 관계를 가지게 되고. 아이가 들어섰음을 알게 되자 두려움에 자살을 기도하다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온갖 신앙적, 사회적 이유를 들어 마을 여성들과 관계하던 '프래스턴'은 그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 '아빈'에게 살해당하고 말죠.

 

목사를 처단한 후 마을을 도망쳐 나오던 '아빈'은 '칼'과 '샌디'의 타깃이 되지만, '로이'와는 달리 역으로 살인마를 처단하고 살아 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하나뿐인 여동생 '샌디'의 복수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신의 선거를 위해서라도 '아빈'을 처치할 필요가 있었던 '리' 또한 '아빈'에게 목숨을 잃고 말죠.

 

 

 

 

 

 

# 12. 

 

'윌로드', '로이', '칼', '샌디', '프래스턴', '리'. 이들 모두는 자신의 합당한 목적 하에 타인의 희생을 정당화한 인물들입니다. '윌로드'는 전우에게 안식을 준다는 명분 하에 총구를 겨눴고, 아내를 살리기 위해 '잭'을 희생시킵니다. '로이'는 진심 어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부활을 목격하기 위해 '헬렌'에게 죽음을 강요합니다. '칼'은 영원히 남겨질 예술 사진을 찍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샌디'는 '칼'과의 동행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안정을 갈구하고자 희생자를 찾습니다. '프래스턴' 역시 제 딴엔 외롭고 신실한 소녀의 영혼에 신앙적 안식을 선사한 것이라 변명할 테고, '리' 또한 겉으로나마 마을의 치안과 동생의 복수를 명분으로 총구를 휘둘렀다 말하겠죠.

 

흥미로운 점은, 악마임과 동시에 이들 모두 다른 이들의 합당한 목적 앞에 희생당한 악행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각자의 비극적 최후는 모두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대단히 밀접한 인과로 연결되어 있죠.

 

 

 

 

 

 

# 13.

 

포스터를 수놓은 주요 인물들이 죄다 죽어나가는 동안,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빈'이죠. 따라서,

 

 

어떻게 '아빈'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을까.

'아빈' 은 다른 인물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라는 물음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4. 

 

'아빈'은 자신의 명분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폭력을 치장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폭력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스스로의 명분으로 악행을 생산하던 사람이 아니기에, 악마가 모두 사라지자 '아빈'은 눈을 감고 잠에 들 수 있었던 거죠.

 

영화는 악행 그 자체보다 악행의 정당화를 부정합니다. 사라지지 않는 악마를 잠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악행을 정당화하는 신념을 깨부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 정의로운 명분 앞에 희생되게 될 누군가들로부터의 보복뿐이라 말합니다.

 

 

 

 

 

 

# 15.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생각하며 영화를 돌아보면 덜컥 발목을 잡아채는 코드가 하나 있습니다. '전쟁'이죠. 영화의 시작과 결말을 구태여 전쟁으로부터 시작해 전쟁으로 받아내는 대목이나, 중반부에 구태여 군인인 '개리'가 등장해 '칼'과 '샌디'로부터 살해당하는 대목은, 반전주의적 메시지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개리'는 주요 인물들의 관계도에서 완벽히 동떨어진 인물로서, 유일하게 악행을 직접 저지르거나 악행의 부산물이 아님에도 희생된 사람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라는 직업이 전부란 이야기죠.

 

 

 

 

 

 

# 16.

 

개인적으론 이 영화에서 종교에 주목하는 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작품에서 종교의 역할은 그저 '선의의 악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동기 중 하나이자 전개 상 필요한 광기와 폭력의 에너지를 손쉽게 끌어오기 위한 동력원 정도로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종교 외에 다른 수단들, 이를테면 경제적(리) 문제나, 철학적(칼), 심리학적(샌디), 성적(프래스턴) 동기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론 작가의 입장에서 주제의식을 혼탁하게 하지 않는 동기로서 형이상학적인 종교가 제격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신실함과 같은 고차원적 가치로도 자신의 악행을 회개할 수 없다는 종언과 같은 단호함을 일부 더한다거나, 영화 전반에 걸쳐 제의적이고 결정론적인 분위기를 더한다는 부수적 효과도 있어 보이긴 합니다.

 

 

 

 

 

 

# 17.

 

다수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구축하고 있고, 캐릭터들 사이의 인과를 쌓아가는 방식도 안정적이며, 철학적 메시지를 다룸에 있어 감정적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내레이션이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볼륨이 풍성한 소설의 즐거움과 스펙타클한 영화의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타임이 길어도 너무 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마지막 '아빈'과 '리'의 결투 장면은 이전까지 쌓아 올린 메시지의 힘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단편적 구성이라 아쉬울 수 있으며, 결국 '아빈'만큼은 자기 행동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비굴한 결말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

 

전체적으로 제법 무겁고 제법 피곤한 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취향을 타려면 얼마든지 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대신 장르적 기호만 맞다면, 그걸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는 마련해둔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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