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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엉성 _ 어멍, 고훈 감독

그냥_ 2020. 9. 2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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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뭘 하고 싶은 영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암에 걸린 엄마가 등장하긴 합니다. 대립관계의 아들도 등장합니다. 제주 문화도 등장은 하죠. 하지만 평생 물질하며 가정을 건사한 제주 해녀의 생애를 진중하게 조명한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구요. 엄마와 아들의 갈등과 교감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를 만든 것도 아닙니다. 눈 딱 감고 화끈하게 제주 홍보물을 만든 것도 아니죠.

 

 

 

 

 

 

 

 

'고훈' 감독,

『어멍 :: Eomung』입니다.

 

 

 

 

 

# 1.

 

이 영화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숙자'뿐이죠. 나머지 모두는 그녀의 설정을 보강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아들 '율'은 한심해 보이기 위한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수집해 기워놓은 인물입니다. 이 인물의 인격과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가운데 마치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불효자와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죠. '율'을 구태여 경제적으로 불안한 영화감독 지망생으로 만든 것도, 그마저도 민망한 에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으로 만든 것도, 제작사 대표가 돈을 들고 튀게 만든 것도, 집세를 날려먹고 엄마 집에 들어앉게 만든 것도, 흥청망청 술 마시고 노는 것도, 전화할 때면 최대한 웅크려 비굴하게 구는 것도 모두 이 인물이 충분히 한심해야 그만큼 숙자의 존재와 태도가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막무가내로 은행 빚을 지게 한 후 엄마가 집 팔아 갚았다는 식의 신파까지 더해지면 완벽하죠.

 

영화에서 묘사하는 '율'은 (음주운전이라는 단편적 사건을 제외하면) 잘못한 점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부모 손을 빌리는 인물도 아니고 제 필요에 따라 가사를 거덜 내는 인물도 아니죠. 미숙하게 사기꾼에게 속아 빚을 지게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대신 갚아달라 떼를 쓴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속인 사기꾼이 잘못한 사람이지 속은 사람이 잘못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삶이라는 것이 부모에게 걱정스러운 삶일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묘사하는 것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되려, 영화 내내 가족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건 숙자의 땡깡 쪽이죠.

 

더군다나 무명의 독립영화감독인 자신이, 감독 지망생인 '율'을 비난하는 건 너무 비열한 짓 아닌가요.

 

 

 

 

 

# 2.

 

'매제'는 율을 더욱 한심한 인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훤칠한 허우대에 빳빳하게 다린 양복, 못도 박아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단단히 고정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 싹싹하고 자상한 성격의 안정적 직업군 종사자. 영화가 제안하는 바람직한 청년상이죠.

 

스테레오 타입의 모범 청년이 또 다른 아들이었다간 숙자와 율 사이에 너무 많이 개입하게 될 테니 거리를 조금 둘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예 남이었다간 아들과의 대조가 덜할 테니... 어디 보자, 사위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이후 빚과 관련된 갈등을 만들기 위해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추가적으로 욱여넣으면 더욱 편리합니다.

 

바른생활 청년이 매제가 되려면 누이가 있어야 할 테니 이제 누이를 만들어 붙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누이가 영화에 충분히 기여할 가능성은 전무하겠죠. 적당한 타이밍마다 적당히 나타나 적당히 오열하다가 적당히 사라질 겁니다. 그 오열마저도 아들의 내적 감수성과 대조하기 위한 과장된 수단에 불과할 테구요. 그리고 역시나 예상 그대로. 영화에서 누이는 농협 앞에 쭈그려 앉아 한바탕 울고 엄마 집에서 한바탕 우는 것 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엄마가 시한부라는데요. 자식도 둘이나 있는 X이.

 

 

 

 

 

 

# 3.

 

소꿉친구 남매는 일종의 쓰레기통입니다. <주인공 모자의 갈등>이라는 주요 서사 이외에 영화가 짊어져야 할 자잘한 짐들을 모조리 쏟아부어 둔 캐릭터들이죠. 율이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게끔 돕는 병풍이자, 율이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고 정리하는 공간이자, 의식적으로 숙자 모녀와 대응되며 '순환' 따위의 부차적 코드를 짊어지게 하는 수단이자, 제주와 관련된 토속적 아이템의 할당량을 상당 부분 감당하는 광고판이자, 기능적으로 분위기를 환기할 용도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노래와 코미디 따위를 수행하는 광대입니다.

 

율이 자기 엄마가 오늘내일하는 판국에도 유부녀 친구 카페를 그토록 뻔질나게 찾아가는 건 친구 남매가 그만큼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인물들이 미션을 수행할 시간을 최대한 벌어주기 위해서일 뿐이죠.

 

 

 

 

 

 

# 4.

 

필요에 의해 모든 인물들은 숙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람직하다 할 수는 없지만 뭐 그래요. 그러려니 합시다. 그럼 적어도 엄마 캐릭터에 대한 묘사만큼은 풍부했어야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숙자는 괴물입니다. 시종일관 화가 나 있는데 이 화를 설득하는 과정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부실합니다. 한량 같던 아빠와 불효자 아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죠. 영화 시작부터 엄마는 온갖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쏘아붙이고 싸움을 걸며 일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인물처럼 그려지지만, 그 정서적 기반은 관객과 전혀 공유되지 않습니다. 관객과 가장 밀착되어야 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 가장 괴물 같아 보이는 영화라니 여기가 지옥인 걸까요.

 

 

 

 

 

 

# 5.

 

모든 캐릭터는 엄마를 위한 도구인데 정작 엄마는 괴물이 되어버린 이 사달이 난 이유는 명확합니다. 캐릭터 구성과 서사의 시점이 따로 놀기 때문이죠. 작품의 캐릭터 구성은 말씀드린 대로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만, 영화의 시점은 '아들'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진으로 치면 포커스가 나간 것과 같달까요.

 

숙자를 설득하는 게 목적이고 그를 위해 주변 인물을 희생시킬 거라면 살날이 그리 머지않은 숙자의 허무함과 불안함과 고통과 고독감과 표정과 버릇과 시선과 눈빛 따위의 일과를 충분한 시간과 함께 정성스레 공들여 담아냈어야 합니다만, 카메라는 내내 아들과 겉돌기 바쁩니다. 엄마와 아들 간의 관계, 특히나 아들의 시선에서 엄마를 이해하고 교감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율의 캐릭터성만큼은 최대한 입체적으로 살려뒀어야 했습니다만, 누차 말씀드린 대로 전혀 그러지 못하죠.

 

구성과 시점이 따로 놀다 보니 숙자는 숙자대로 미친 X마냥 승질만 내고, 율은 율대로 한심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야말로 골 때리는 영화가 완성됩니다. 엄마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데 영화의 포커스는 아들과 함께 세월아 네월아 노닥거리고 있으니 정서적으로 고조될 리가 있나요. 작품이 시작한 지 고작 20분 만에 관객은 1. 어쨌든 엄마가 죽을 거라는 것과, 2. 아들과 엄마가 투닥거릴 거라는 것과, 3. 결국엔 아들이 시나리오 쓰기를 포기할 것이라는 것과, 4. 하필 요긴하게도 남편이 없는 소꿉친구와 연인이 될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서적 발전도 전개도 없이 제주 풍광 소개나 하고 있는데 지루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 6.

 

숙자의 내면 묘사가 전무한 상황에서 마지막 대뜸 아들의 꿈을 밀어주고 병원 치료를 받겠다 말하다 보니, 극적인 이해나 화목이 아니라 그저 뜬금없는 헛소리처럼 들리고 맙니다. 감독은 왜 결말에서 갑자기 유턴을 주문한 걸까. 이대로 아들이 꿈을 접은 채로 숙자가 죽어버리면 엄마가 너무 고집스러운 악당 같아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치료해서 살아났답니다! 라고 하기엔 그것대로 자신이 없었을 테고요. 마지막 급선회는 이런 수습용 면피 외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숙자의 불법 유턴으로 인해 고심과 절망 끝에 꿈을 접었던 아들은 그야말로 병신이 되어버립니다만, 누차 말씀드린 대로 어차피 감독은 아들 율과 그의 심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에서 엄마와 아들이 격정적으로 마음을 쏟아내는 장면은 나름의 감동과 고조가 있긴 합니다. 다만 그 역시 어디까지나 영화 고유의 성취가 아니라 그저 시한부 엄마와 무심한 아들이라는 설정이 가지는 최소한의 동력에 불과합니다. 막말로 그 전까지의 영화를 하나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남편 없이 물질해서 가족 먹여 살렸다!'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감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 7.

 

전반적인 시나리오가 이모양이면 파편적인 아이템을 다루는 방식의 실패나 개연성 붕괴는 예정된 것과 같습니다. 특히 숙자의 암이 재발했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총체적 난국이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처음 듣게 되는 장면에서 의사는 율에게 항암치료 포기 동의서를 내빕니다. 항암치료 포기 동의서. 이 문서는 치료를 진행하던 환자가 치료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판단하여 더 이상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순간 작성하게 되는 문서죠. 하지만 숙자는 애초에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말합니다. 입원하지도 않았어요. 그럼 동의서를 받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더군다나 동의서를 건네는 순간 의사의 대사는 귀를 의심케 합니다. 여기 보호자란에 사인만 하시면 된다구요? 돌팔인가?

 

암이 재발한 후 숙자는 치료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가치관 때문이라 설명하죠. 그럼 첫 번째 발병 당시에는 왜 치료를 받은 거죠? 이상하잖아요? 특히 암이 한번 발병했다가 나은 환자의 경우 수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검사하며 발병 여부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힘들게 돈과 시간과 고통을 들여가며 암을 치료한 사람이라면 이 검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고, 완치 후 검사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재발이 확인되었다면 치료를 거부할 이유가 없죠.

 

말인 즉 애초에 영화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재발'이라는 코드 자체가 없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8.

 

엄마 숙자가 통증을 못 이겨 병원을 찾은 밤. 피로 물든 발자국이 방바닥에 선명히 찍혀 있다는 건 각혈을 했든 하혈을 했든 상당한 피를 흘렸다는 의미일 텐데요. 그럼 음주 단속 중인 경찰이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디 배탈 나서 끙끙대는 것도 아니고 고령의 할머니가 피 줄줄 흘리고 있는데 고작 대응이 저따위라구요? 더군다나 율은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음주 단속에 걸린 게 아니라, 술 마시고 집에 와서 자는데 엄마가 깨워서 병원에 데려다 달라하는 바람에 걸린 상황입니다. 단속에 걸린 건 걸렸다 치더라도 그걸 숙자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고 쳐 자빠진 거죠?

 

평생 물질만 해온 해녀 숙자가 노래를 너무 잘 부르도록 방치한 것도 디렉팅이 부실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물질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엄마 없는 빈집의 전경>이나 <새로운 삶을 찾는 아들의 뒷모습> 따위가 아니라 친구 카페로 받아내게 하는 것 역시 부실한 작가적 역량을 가늠케 하죠.

 

 

 

 

 

 

# 9.

 

제주 사투리가 너무 강하게 쓰인 것도 감상을 방해합니다. 몇몇 주요 어휘를 잡는 것으로 상황 판단까지만 가능할 뿐 수사적 표현은 현지인이 아니고서야 거의 날려먹게 되죠. 제주 방언의 언어학적 가치는 알겠으나 영화를 보는 관객인 나의 감상이 그 잘난 언어학적 가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요?

 

엄마가 하루하루 죽어가는 데 아무리 호X자식이기로서니 카페에서 글질이나 하고 자빠지는 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만 이는 한라봉차와 같은 지역 특산물을 어거지로 소개하는 대목에 불과합니다. 모자의 드라이브 장면은 제주 해안가 드라이브의 그림을 따기 위한 장면에 불과하고, 친구 카페에서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는 장면 역시 한창 유행하던 효리네 민박식 제주 1달 살기류 갬성 광고에 불과합니다. 엄한 해녀 한분이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는 해녀들도 왕왕 사고가 난다는 정보와, 제주의 장례문화를 약식으로 묘사하기 위함이고, 엄마의 체험관 문화 공연과 같은 코드들 역시 지역 공연 홍보에 불과하죠.

 

# 10.

 

이 영화를 한 줄 요약한다면 주제 파악의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엄마 숙자의 생애를 조명할 것인지, 죽음을 앞두고 단절된 모자 관계의 회복을 묘사할 것인지, 제주 문화의 매력을 과감하게 어필할 것인지를 놓고 명확한 주제主題를 설정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저 세 가지 코드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깜냥에 대한 오판이기도 합니다. 총체적 난국이군요. '고훈' 감독, 『어멍』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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