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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_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

그냥_ 2019. 10. 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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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수개월 전 예고편을 보고 난 후부터 생각했습니다. 죽인다. 예술이다. 기가 막히다. 여태까지 140여 편을 리뷰하는 동안 작품이 너무 좋아서 씬 별로 쪼개가며 돌려 봤던 작품은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뿐이었는데요. 이 영화는 앞선 두 작품만큼이나 노력과 시간을 쏟아붓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라 생각했습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

『조커 :: JOKER』 입니다.

 

 

 

 

 

# 1.

 

이야기거리는 충분합니다. 팀 버튼이 정의한 유머와 품격의 검은색 조커, 크리스토퍼 놀란이 정의한 혼돈과 공포의 보라색 조커와는 차별화된 불안과 절망의 토드 필립스식 주황색 조커를 영화 전반에 걸친 색감을 중심으로 비교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주요 장면마다 나오는 거울에 비친 아서와 그의 뒷모습이라던지, 혹은 왼쪽과 오른쪽 얼굴의 구분된 활용에 따른 한 인물에 혼재해 있는 다각적 정체성들과 그 정체성들의 역학관계라던지, 혹은 그런 힘겨루기가 역전되어 가는 서사적 과정들과 영화적 묘사에 대해 썰을 풀 수도 있겠죠.

 

빛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인물의 타락이 본연의 순수성을 퇴색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 여타의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인 악당들과 차별화된 순수악으로서의 성격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녀린 다리로 힘겹게 오르는 계단들과 대조되는 가파르게 쏟아지며 하강하는 계단들. 그리고 그런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의 심리적-철학적 상황 변화를 이야기하거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추는 광대 춤에 대한 해석들과, 계단을 내려오는 결정적 장면에서의 폭발하는 해방감과, 이면에 숨은 살풀이 같은 처연함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볼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날아갈 듯 빼빼 마른 몸매로 은유된 깊은 피로감이라던지, 각기 다른 축으로 대응되는 수직적-수평적 운동성에 숨은 함의라던지, 비와 피의 상징성이라던지, 인간으로서의 온기와 습기를 제거하는 냉장고에 구겨 넣는 몸뚱이라던지, 시종일관 여러 이유로 토해내듯 웃고 있지만 끝내 진정한 웃음은 꺼내지 못하는 내면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광대 아서가 조커로 타락하면서부터 되려 병적인 웃음을 토해내지 않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 사회 속 개인적 행복의 역설을 조명한다던지. 심지어는 더 디테일한 소품들과 요소들, 이를 테면 사소한 시선의 처리나 한마디 한마디의 대사,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냐 따위를 분석적으로 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아싸리 대물림된 망상장애라는 설정에 주목해 플롯을 뒤틀어 조커라는 빌런의 존재론적인 불확실성을 근거로 영화 자체를 뒤집어 볼 수도 있겠죠. 이 모든 게 다 뻥이야! 라는 식으루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런 생각들이 싹 사라졌습니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가 싶더군요.

 

 

 

 

 

# 2.

 

가장 희극적인 촌극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조차 무수히 쏟아내고 있는 해설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온갖 관객들과 리뷰어들이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는 마냥 어떻게든 다른 사람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법한, 더 정확히는 발견했더라도 미처 '발견했다고 자랑하지 않은 숨은 문제들의 해답들'을 과시하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듯하죠.

 

사람들은 아서와 아서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을 파헤치고 해체하고 분석하고 재조립한 후 결론을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타인의 삶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는 머레이나 토머스 웨인처럼 말이죠. 특히 타임지였던가요. 아서가 타락하게 된 동기가 너무 뻔하고 평범해서 설득력이 없다는 논평은 주류 화이트 컬러들의 다른 상황에 놓인 타인에 대한 무신경하고 무지한 인지적 폭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 밖 백미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불행은 개인적입니다. 괴로움에 상대성은 공허하죠. 타인이 감내할 수 있는 불행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까지 편리하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존재가 부모의 자기 자식에 대한 걱정에 위로가 되지는 않죠.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들고 당일 저녁 끼니를 때울 700원짜리 라면 하나를 사지 못해 고개를 떨구는 사람의 절망감은 적어도 그 사람에겐 온 세상의 무게만큼이나 버거운 것일 수 있습니다만, 한창 쏟아지는 대부분의 비평과 리뷰에는 이런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공감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주제의식부터가 타인의 삶에 대한 정성적 배려가 말살된 채 정량적 평가에만 매몰된 사회의 건조함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쉽게 말해 고상한 일류 토크쇼나 시장 테이블에서 펼쳐지는 고매한 해설이 아닌 사소할지언정 진심을 담은 공감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타임지의 논평과 분석적 리뷰들은 스크린 밖에 펼쳐진 고담의 실체화처럼 보일 지경이죠.

 

 

 

 

 

# 3.

 

아서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서라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에게 열광하는가가 중요하죠. 왜 사람들은 조커를 좋아하는 걸까. 멋진 중저음의 크리스찬 베일의 아치 에너미로서의 히스 레저와는 차별화된, 자연인 아서가 더욱 부각된 전혀 슈퍼하지도 힙하지도 않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게 중요합니다.

 

왜 고담의 사람들은 돈 많은 금융전문가들의 사망에 열광하는가. 왜 사람들은 광대 가면을 자처하는가. 영화 안과 밖의 상처 받은 사람들이 아서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공감하고 있는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걸 얘기해야죠. 짝다리 짚고서 쟨 찐따라 어쩔 수 없다 말하는 건 공허합니다. 왜 찐따가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건 무의미하다니까요. 영화를 본 찐따들이 미친 짓을 할까 봐 두려워 영화관의 입구에서 총기 검사를 하고 있는 미국의 극장들은 계단에서 선보인 클라이맥스의 춤사위보다 마지막 경찰차에 올라선 조커의 표정보다 훨씬 비극적이고 희극적입니다.

 

 

 

 

 

 

# 4.

 

절벽에 매달린 사람입니다.

 

떨어지지 않으려 어떻게든 절벽의 끄트머리를 피가 줄줄 흐르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매달려 있지만, 차마 몸을 끌어올릴 힘은 없는 사람. 이내 연약한 절벽의 끄트머리가 부서져 내리자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계곡 아래로 떨어지며 손에 쥐어진 돌멩이 하나를 허공에 내던지는 마지막 찰나의 모습을 대단히 과격하게 풀어낸 서사랄까요.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포기해버린 사람의 안도감과, 버거움으로부터 벗어난 찰나의 해방감과, 떨어지고 있지만 저항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음을 명확히 알 고 있는 사람의 가릴 수 없는 슬픔이, 얼굴을 가득 메운 흰 바탕에 번지는 파란색 눈물이 되어 뒤엉켜 있습니다.

 

머레이의 머리와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은 아서가 경찰차 위에 올라서서 다시 그리는 찢어진 입은 피로 그려지지만 그 피는 그가 흘리게 만든 다른 누군가들의 피가 아닌 '자기 자신의 피'라는 게 중요합니다. 영화는 절망의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인격의 숨길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존재가 만들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던 무수히 많은 기회와 사회 안전망의 부재를 이야기합니다. 아캄 정신병원에서 브루스 웨인을 떠올리며 '조크'가 생각났다 말하는 장면은 아서를 완전히 벗어던진 토드 필립스만의 조커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절대적 절망과 깊은 냉소의 조커 말이죠.

 

 

 

 

 

 

# 5.

 

이 영화의 조커가 이례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지금 절벽에 매달린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겁니다. 각자의 절벽은 높이도 다르고, 매달린 사람들의 팔힘도 다르고, 절벽의 단단함도 다르겠죠. 누군가는 위에서 끌어줄 사람이 곁에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기 힘으로 절벽을 거슬러 올라 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떨어진다 해도 받아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차마 놓지 못하는 '올바르게 또 행복하게 살아 보고 싶다는 가녀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게 부질없는 짓은 아닐까라는 회의감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본질입니다.

 

타란티노는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를 말하는 주류 미디어들에게 '영화를 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를만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영화를 보았을 뿐'이라 일갈합니다. 어쩌면 진짜 이 영화와 그리고 영화 속의 아서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한 사람은 타란티노 감독뿐이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 6.

 

슈퍼히어로물로서는 이례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 부실합니다. 영화에는 '고담'이 없습니다. 이건 이상한 거거든요.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물들은 배경이 되는 세계를 대단히 공들여 설명합니다. 그래야 파괴적이고 과격한 설정의 인물들에 관객이 납득하기 때문이죠. 세계관의 설명이 부실해 버리면 관객은 영화의 거의 모든 것들을 대단히 뜬금없게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고담'을 공들여 만들지 않았음에도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빌런이자 주인공인 조커가 충분히 '슈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으론 충분히 설명되지 않죠. 전 이 지점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언제고 그런 괴물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고담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가 쉽사리 고담을 정의하지 않은 덕에 스크린 너머 온 세상은 자신 속에 내재된 고담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변의 아서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 7.

 

스파이더맨 트릴로지가 슈퍼히어로 영화 재해석의 시발점이 되고, 다크나이트 트릴로지가 샘 레이미의 재해석을 한번 완성했다 한다면,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다시 한번 확장하고 있다 평가합니다. 슈퍼히어로물이 대중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걸 넘어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방점을 한번 딱 찍는 느낌이랄까요.

 

흔히들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부정적으로 평할 때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기성품'같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요. 기성품의 반대가 뭐죠? 네, '명품'이죠. 이 영화가 그 명품입니다. 명품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들어먹는 건 사용성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일 텐데요. 다행히 영화는 제 아무리 명품이라 하더라도 같은 값에 소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토드 필립스 감독, <조커>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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