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Romance

꽃을 찢고 질문하다 _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그냥_ 2019. 9. 3. 23:30
728x90

 

 

# 0.

 

독특합니다.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창적인 이야기가 관객의 이목을 부여잡습니다. 서사가 어떻게 굴러가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꽂힙니다. 설정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매력을 지키되 따로 놀지 않습니다. 완성도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감동을 다른 영화에서 얻기란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요르고스 탄티모스'라는 이름을 평생 기억하게 할 계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요르고스 탄티모스' 감독,

『더 랍스터 :: The Lobster』입니다.

 

 

 

 

 

# 1.

 

기괴하고 불편합니다. 특유의 건조한 분위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설정 위에서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이 널을 뜁니다. 서사에 깊은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독이 밀어붙인 설정을 관객이 재주껏 받아먹어 줘야만 합니다. 이질적 요소들을 넘나드는 동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라는 현타가 올 수도 있습니다.

 

불친절한 묘사가 가득합니다. 가벼운 대화조차 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영화를 다신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돈과 시간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어 보입니다만 별개로 무지막지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전반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강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제게 그런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거죠.

 

다만 분명한 것은 관객의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이 감상에 문제가 된다면 그건 돈 쓴 관객의 탓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못 알아먹은 건 어디까지나 영화가 잘못한 거죠. 착한 갑질 인정합니다. 지금부터 전하는 리뷰는 앞선 여느 리뷰보다 편협하고 오독된 것일 수 있습니다만 뭐 어떤가요. 돈 쓴 순간 적어도 영화에 대해선 전 절대적인 갑입니다.

 

 

 

 

 

 

# 2.

 

꽃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있으시다구요? 아뇨, 장미 말구요. '꽃'이요. 장미 말고 민들레 말고 백합 말고 튤립 말고 '꽃'이요. 없으시죠?

 

우린 '꽃'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지만 개념 자체를 보거나 만질 수는 없습니다. 꽃이라는 개념이 현실에 구현된 구체적인 무언가로 대신할 뿐이죠. 우린 장미를 민들레를 백합을 튤립을 보고 만질 수 있지만 '꽃'을 그러하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린 '개'를 볼 수 없습니다. 요크셔테리어나 진돗개나 시츄나 말티즈를 대신 볼 뿐이죠. 이 영화는 눈 앞에서 꽃을 찢어 발기는 영화입니다. 개를 잡아 죽이는 영화입니다. 그러고선 물어보죠. '꽃'이란 무엇이냐고 '개'라는 게 무엇이냐고. 당신이 알고 있는 '꽃'과 '개'가 진짜 '꽃'과 '개'가 맞는 거냐고.

 

원래 가지고 있던 개념들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비틀거나 제거함으로써 본질을 맞닥뜨리게 합니다. 억지로 발가 벗겨진 본질이 주는 절대적 위화감이 영화의 모든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 전달받을 모든 장점의 시작이면서 모든 단점의 이유입니다. 고정관념이라는 튼튼한 기둥을 잃고 부유하는 관념들과 함께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사람의 감상과, 부유하는 관념들에 어지러움을 느끼는 사람의 감상은 천지차이일 겁니다.

 

날 선 회칼을 틀어쥔 감독의 도마 위에 관념들이 줄지어 오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관계란 무엇이고, 우리가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의 근원이란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이 유능한 요리사 앞에 놓인 생선처럼 능숙하게 해체됩니다.

 

 

 

 

 

 

# 3.

 

짝을 맺지 않으면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호텔입니다. 호텔 매니저는 이성과 관계를 맺는 이유를 억지스러운 연기와 함께 희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남자에게 여자 짝이 필요한 이유는 하힘리히법을 받기 위해서라느니, 여자에게 남자 짝이 필요한 이유는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느니 하는 대목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죠. 호텔은 관계 맺기를 독려하는 시설입니다. 메이드는 매일같이 남자의 성기 위에 올라타 발기를 유도합니다만 자위는 금지되어 있죠. 성욕을 키워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폭력적이고 이질적이죠.

 

동질감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그 집착에 대한 희화화도 흥미롭습니다. 반드시 커플이 되어 도시로 돌아가겠다던 '절름발이 남자'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의 공통점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의 머리를 벽에 찧습니다. '데이비드' 역시 '냉혹한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냉혹한 척을 합니다만 감정을 억지 연기한 대가는 형의 죽음이었죠. 징계를 피해 호텔에서 달아난 '데이비드'는 숲에서 '근시 여자'와 근시라는 생물학적 공통점 위에서 교감합니다.

 

숲으로 도망간 외톨이들은 호텔 커플들을 습격해 관계를 망가트리려 합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배우자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호텔 지배인의 남편과, '데이비드'의 '절름발이 남자'의 연기에 대한 폭로 후 싸늘히 식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의 표정과, 자기 대신 남자 친구의 눈을 멀게 하면 안 되는 거였냐 묻는 '근시 여인'은 마치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감독은 성욕에 기반한 관계도 이익에 기반한 관계도 동질감에 기반한 관계도 자기중심적인 관계도 이상한 것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관객은 직관적으로 저런 기계적 동기 위에 성립하는 관계와 사랑을 이상적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죠.

 

 

 

 

 

 

# 4.

 

다만 달리 생각해보면 관계라는 게 성욕으로부터 독립된 것일 수도 없습니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익에 독립되어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동질감을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독립된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타적일 것을 기대하는 것 역시 무의미합니다. 메이드가 발기를 유도하는 것은 가학적이고, 매니저의 연기는 우스꽝스럽고, 코피를 내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찧는 건 미련한 일이지만, 그런 것이 모두 제거된 이후의 사랑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랑이 성욕으로서의 사랑도 이익으로서의 사랑도 동질감으로서의 사랑도 자기중심적인 사랑도 아닌 걸까요? 만약 성욕으로서의 사랑이나 이익으로서의 사랑이나 동질감으로서의 사랑이나 이기적인 사랑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저 상황들을 '괴기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요? 어렵군요.

 

영화의 포스터는 이와 같은 관념에 대한 고찰이 영화의 주제의식에 닿아 있다는 힌트처럼 보입니다. 포스터의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는 끌어안고 있음을 표현하지 누구를 안고 있는지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누군가나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정서에 대한 통찰이 메시지라는 걸 감각적으로 은유합니다.

 

 

 

 

 

 

# 5.

 

새로운 질문을 찾아볼까요?

 

45일 동안 짝을 찾지 못해 개가 되어버린 형이 '데이비드'의 손에 이끌려 호텔에 들어섭니다. 그는 혹은 그 개는 어떤 존재인 걸까요.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감독은 관객에게 그 개가 '데이비드'의 형이라 설명합니다. '데이비드'는 감독의 설정대로 충실히 그를 형이라 부르고 대하고 인지하죠.

 

반면 영화에 출연한 개는 여전히 개입니다. 목줄에 매여 움직이고 남자가 던져주는 간식을 받아먹을 뿐이죠. 개가 감독의 디렉팅이라도 알아듣지 않는 한 그가 보이는 행동은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개의 행동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자, '형'이라는 존재와 '형'이라는 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데이비드'와의 혈연 관계인 존재를 의미하는 걸까요? 아니면 누적된 기억인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태생적으로 이어져 온 존재의 연속성인 걸까요?

 

45일의 유예기간이 모두 끝나버린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의 절친이 동물이 되기 하루 전날 호텔 매니저와 미팅을 가집니다. 매니저는 동물이 되는 것이 죽는 것은 아니니, 동물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섹스나 산책 따위를 하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 말합니다. 고전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괜찮은 일이라 말하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매니저의 조언은, 같은 상황에 놓였던 많은 사람들이 섹스나 산책과 같은 임종을 앞둔 사람의 발버둥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새로운 질문이네요. 동물이 되는 것과 죽는 것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죽음은 생명이 다하는 것일까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것일까요,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안전을 상실하게 되는 것일까요?

 

 

 

 

 

 

# 6.

 

영화에는 크게 3가지 공간이 등장합니다. 호텔과 숲과 도시죠.

 

호텔은 획일적입니다. 호텔에 들어선 '데이비드'에 꼭 맞는 옵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를 위한 양성애자 옵션이나 반치수 짜리 옷가지는 존재하지 않죠. 생존을 위해 자신과 다른 형태의 삶을 선택했을 뿐인 사람들을 사냥하는 몰인간성을 강요받습니다. 목적을 위해 거세된 본능과 자유는 도구적으로 편입됩니다.

 

숲은 호텔과 대척점에 있는 공간입니다. 사냥을 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모든 것은 본인의 손으로 얻은 본인의 것이지만, '본인의 것 일 수 있다'가 아니라 '본인의 것이어야 한다'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자유라는 절대선에 반하는 사회성은 악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네, 이곳 역시 건강하지 않죠. 기괴한 숲의 법칙을 유지하던 대장은 자신이 만든 무덤이 아닌 남(데이비드)의 무덤에 누워있게 됩니다.

 

도시는 두 공간으로부터 벗어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공간입니다만, 그곳 역시 이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커플인 상태를 검증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단란함을 연기해야 하는 공간이죠. 남녀노소 불문하고 답답해 보이는 수트를 입고, 부모의 앞에서 단란함과 유복함을 연기해야 합니다.

 

세 쪽지점이 극단을 이루는 삼각형으로 그려진 세상입니다. 주인공은 세 모서리를 오가며 과장된 공간의 모순을 몸소 선보입니다. 그럼 질문이 생기죠. 자,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공간인 걸까요? 세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회색지대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 7.

 

짓궂은 감독은 불편한 질문들을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안정적인 고정관념들이 붕괴되는 순간의 독특하고 참신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감독이 제시한 세상이 독특하면 독특할수록 괴기하면 괴기할수록 질문들은 점점 더 깊이를 가지고 확장됩니다.

 

의심치 않던 무언가들이 파괴되어 나갈수록 설명하기 힘든 허무함이 짙게 묻어납니다만 이런 허무함이 세상 부질없다는 식의 냉소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하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묘미입니다. 영화에서 한 발짝 떨어지게 만드는 특유의 건조함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동력 되어줄 막대한 생동감을 함께 전하는 게 매력적이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더 랍스터>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