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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잊음으로써 완성되는 _ 더 문, 덩컨 존스 감독

그냥_ 2024. 1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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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잊음으로써 완성되는 소모되는 가장의 서글픔

 

 

 

 

 

 

 

 

덩컨 존스 감독,

『더 문 :: Moon』입니다.

 

 

 

 

 

# 1.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가장의 삶을 은유한 휴머니즘 드라마다. 클론의 사용기간 3년은 일생을 축약하는 것으로도, 쏜살처럼 지나버린 듯한 당사자의 인식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소소한 이목을 끌었던 기지의 이름 [사랑(SARANG)]은 자신의 헌신이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라 되뇌는 간절함이다. 그것을 굳이 생소한 한국어로 적은 건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쑥스러움을 은유한다. 달리는 러닝머신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 같은 자리를 맴도는 무력감, 내달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두루 은유하는 친근한 메타포다.

 

나무로 조각한 모형은 고단함 끝에 보상이 있으리라는 기대다. '새로운 샘'은 조각에 몰두하는 '낡은 샘'에게 제페토라 부르며 조소한다. 나무 조각이 생명을 가지는 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낡은 샘의 바람은 그의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두 샘이 어린 딸이 등장하는 과거의 영상을 돌려보고 과거의 이야기 밖에 하지 않는 건 회고할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시점에서 가족과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을 쌓지 못해 매번 옛날이야기만 되뇌는 모습은, 익숙해서 더욱 서글픈 우리의 아버지들이다.

 

감독은 가장의 고립감을 지구에서 38만 km 떨어진 달에 빗대어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구태여 영원히 볼 수 없는 달 뒤편에 기지가 있다는 설정은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유폐하는 악의적인 배격이다. 심지어 인공위성의 고장을 핑계로 샘들과의 대화를 차단한다는 데까지 나아가노라면, 자원으로만 취급되는 그들이 간신히 꺼낸 목소리조차 차갑게 거절하고 있는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난이 완성된다.

 

 

 

 

 

 

# 2.

 

낡은 샘과 새로운 샘의 로버가 충돌하며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된다. 같은 모습과 같은 기억을 가진 서로를 발견하며 혼란스러워하다, 회사의 실체를 파해친 끝에 실체적 진실에 도달한다는 서사의 SF 스릴러다.

 

반면 드라마적 관점에서 보자면 낡은 샘과 새로운 샘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샘에게 있어 로버를 타고 헬륨 3을 수집하는 건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반복하고 있을 평범한 출퇴근과 다르지 않고, 둘의 사고 역시 출퇴근길 교통사고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통상 생명이 위협받는 위기를 겪은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인생과 자신의 존재를 점검하기 마련이다. 그 내적 성찰을 '관성적인 낡은 자아'와 '회의하는 새로운 자아'에 대응시켜 물리적으로 분화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책임을 다하려는 아버지와 꿈꾸는 소년의 치열한 갈등과 화해로, 영화의 본질은 마지막 지구탐험이나 인과응보 따위가 아닌, 한 인간의 양면을 진중하게 관찰한 끝에 우리 주변의 가장들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이다.

 

이처럼 헌신적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라는 알레고리에 힘입어 따뜻하고 감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하곤 하지만, 사실 오해다. 덩컨 존스의 데뷔작은 생각보다 훨씬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다. 세계가 가장들을 착취하고 있다 진단하는 작품에서 착취의 수혜자인 '모든 사람들'에 관객까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고, 영화가 그런 관객들을 편하게 둘리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것이다.

 

 

 

 

 

 

# 3.

 

영화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선 인공지능 거티의 함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HAL 9000에서 빌려온 거티는, 자신이 오마주한 로봇과 달리 적극적인 조력자로서 역할한다. 몇몇의 상황에서 통제하려 들긴 하지만 별 무리 없이 샘이 원하는 바를 지원하고 있고, 특히 마지막의 패스워드를 알려주는 모습은 일견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거티는 선량한 것일까. 별 문제의식 없이 샘을 착취하다 변덕스럽게 샘을 가엽게 여겨 도와주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결국 포맷(Format)된다는 것이다. 지구에서 사달이 일어날지언정 사랑이라 이름 붙인 기지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당장 눈앞의 새로운 샘은 다정한 인사와 함께 지구로 돌려보내겠지만 다음의 샘은 거티에 의해 길들여지고 착취될 게 뻔하다.

 

냉소적인 영화는 망각으로 완성된다. 시선의 기준에서 보자면 거티는 사람 없는 공간에 소외된 샘을 카메라 너머 지켜본다는 면에서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존재다. 잠시동안 거티였던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샘을 잊고, 마침내 오늘도 러닝머신을 달리고 있을 수많은 가장들까지 잊을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샘이 우리도 인간이라 말하자 거티는 답하는 대신 스크린 앞에 등을 돌린다. 누군가의 착취 위에서 그들을 망각하고 사는 우리 모두 인간이 아니라는 서늘함이다. 어쩌면 덩컨 존스의 거티는 스탠리 큐브릭의 그것 만큼이나, 아니 그것 이상으로 잔혹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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