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It's the greatest show time!
곤 사토시 감독,
『파프리카 :: Paprika』입니다.
# 1.
2010년의 무더웠던 여름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제법 친했던 녀석과 영화관을 찾았다. 걸작 <다크나이트>를 통해 완전히 궤도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은, 둘이서 영화를 보는 쑥스러움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꿈과 무의식에 대한 독창적인 재해석, 플롯을 루빅스 큐브 가지고 놀듯 한다⁽¹⁾는 평을 들은 <인셉션>(2010)을 본 후, 홍조 띤 얼굴로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에게 말했던 감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미 <파프리카>를 봤다."
파프리카는 작품을 만든 곤 사토시조차 모르겠다 말할 정도로 모호하다. 영화는 피상적이면서 단순하다. 자유롭지만 구속적이다. 쾌활하지만 허망하고, 낭만적이지만 서글프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픽션이다.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욕망이다. 기억과 트라우마가 조립된 환상이다. 순리와 부조리 사이에서 탐미하는 원리다. 그 모든 것의 경계가 웅대하게 조화하고 장엄하게 무너지는 경험은 '굳이 애니메이션인 이유'의 정수로서 부족함이 없다. 꿈에 잠식되어 버린 인물들의 시적이고 감상적인 대사, 직관적인 무작위성의 퍼레이드는 이상적인 꿈의 시현으로서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질문한다.
# 2.
모호한 가운데 선명한 테마는 역시나 '욕망'이다. 다만 여기서의 욕망이란 대상에 대한 구체적 감정이라기보다는 의지의 강렬함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히무로 케이는 토키타 고사쿠에 대한 강한 열등감이고, 이는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동안 안에서부터 메마른 주검으로 묘사된다. 오사나이 모리오는 치바 아츠코에 대한 뒤틀린 사랑이고, 그 왜곡됨은 이누이에 복무하는 비굴함으로 묘사된다. 코나카와 토시미는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영화라는 꿈에 대한 트라우마의 존재다. 토키타 고사쿠는 미성숙한 의식과 천재적인 능력의 괴리에 배고파하는데, 좁은 엘리베이터에 끼인 큰 몸뚱이는 그 자체로 내면을 표현한다. 이누이 세이지로는 휠체어로 상징된 신체적 콤플렉스와 그 반동으로서의 통제욕과 지배욕으로 파멸에 치닫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 후반부 사람들의 모습은 흥미롭다. 다 집어치우고 뛰어내려 버리고 싶다는 샐러리맨의 거창한 것에서부터, 여고생의 치마 속이 궁금한 더러운 아저씨들의 치졸한 것까지 말이다. 음악의 꿈을 품고 살던 사람은 자신을 잃고 기타가 된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가족을 잃고 금고양이가 된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앞다퉈 높은 의자에 오른다. 욕망에 잠식된 무의식과 꿈과 트라우마와 부조리의 퍼레이드는 환각적이고 최면적이지만 행복하고, 무엇보다 편리하다. 종교마저 복속시킨 무의식의 욕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노래 부른다. "속세의 시름은 털어버려"
# 3.
영화는 크게 경시감 코나카와의 이야기와, 이사장 이누이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구성된다. 경시감은 꿈을 치료해 현실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인물이고 이누이는 현실의 한계를 꿈을 통해 해소하려 한다는 면에서 서로의 안티테제다. 주인공 치바와 파프리카는 두 인물과 관계하는 동안 '꿈에 지배당한 현실의 불완전함'과 '현실을 잠식하는 꿈의 불완전함' 사이를 기민하게 오간다.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의 붕괴는 위험하다. 한쪽의 강한 중력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부정하는 것 역시 불완전하다. 온전한 자아를 누리지 못한 채 편중된 사람에겐, 착란의 퍼레이드에 도취하거나 현실의 트라우마에 괴로워하거나의 이지선다뿐이다. 결말의 사랑은 필연이다. 경시감은 파프리카만을 동경하고 오사나이는 치바 아츠코만을 욕망하는 데 반해, 토키타는 치바와 파프리카로서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치바 역시 천재 과학자이자 노란 로봇으로서의 토키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하나를 '외면'하는 것도 답은 아니고, 경계를 '붕괴'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곤 사토시의 대답은 '조우'로서의 픽션, 영화다.
생각해 보면 '꿈'과 '현실'은 DC미니를 중심으로 한 메인 콘셉트에 필수적이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작품은 코나카와의 꿈으로 시작하는 데, 각 장면은 어드벤처와 스릴러와 로맨스라는 영화 장르에 대응한다. 경시감과 파프리카가 180도선이나 팬포커스와 같은 기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하다. 앤딩까지 신작 영화의 추천으로 끝난다. 무엇보다 관객이 보고 있는, 주인공의 이름과 같은 파프리카는 다름 아닌 영화다. DC미니에 대한 설명은 충분치 않으나 그것을 모니터로 옮겼을 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영화, 그중에서도 편집 중인 영화로 감독의 시각에서 본 영화다. 파프리카는 그 어떤 작품보다 자전적인 것이다.
# 4.
파프리카는 치바의 또 다른 이름이자, 영화의 이름이다. 경시감은 파프리카(치바의 인격)를 만나고, 관객은 파프리카(곤 사토시의 영화)를 만난다. 오프닝에서 명함을 전달한 파프리카는 결말에서 경시감에게 영화를 추천하는 데, 둘은 사실상 수미상관적으로 같은 행위다. 관객은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곤 사토시의 작품)를 만남으로써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곤 사토시의 무의식)를 만난다. 오프닝에서 장난감 자동차에서 나온 피에로는 선언한다. It's the greatest show time! 경시감이 치바의 파프리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험한 것처럼, 관객은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험할 것이고, 나비와 인간이 중첩된 존재가 되어 자신의 자아를 탐미하는 경험은 이전에 없었던 가장 위대한 쇼타임이다.
경시감은 이사장의 파멸을 통해 향유하게 될 관객의 케이스 스터디다. 경시감은 스크린을 찢기 전까지는 파프리카만을 인지하다가 스크린을 찢고 나서야 비로소 치로를 인지한다. 그리고 그전까지 수차례 마무리 짓지 못하던 영화를 드디어 완성한다. 영화를 완성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이 조우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곤 사토시에게 영화란 현실과 꿈의 조우로서의 자각몽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란 것이 '없는 자아를 창조하는 위대함'은 아니다. 본질은 관객에게 있고 영화는 아주 소량이면 충분한 향신료에 불과하다는 것은 겸허하다. DC미니가 미완성품이라는 것 역시 겸허함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림자도 빛도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남자도 여자도 이미 당신에게 있다. 그저 부족한 매운맛을 살짝 넣어줄 파프리카면? 빙고다. end.
⁽¹⁾ 이동진 평론가의 <인셉션> 한줄평 "플롯을 루빅스 큐브처럼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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