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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불쾌함의 이유 _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감독

그냥_ 2023. 11. 2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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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불쾌하니까 별로라는 감상은 시시합니다.

 

 

 

 

 

 

 

 

박세영 감독,

『다섯 번째 흉추 :: The Fifth Thoracic Vertebra』입니다.

 

 

 

 

 

# 1.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제 아무리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라 한들) 저마다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편하게는 취향,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한다면 감식안(鑑識眼)이라 부르는 것들이죠. 제 스스로 견제하고 점검하는 몇 가지 대전제 중 하나는 '감독은 바보도, 괴물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못 만든 영화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관객은 보편타당한 근거를 들어 합리적인 수위에서 평가할 권리를 가짐에 분명합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저 감독이란 사람들도 관객이 느낄 말초적인 감상을 모를 정도로 단순한 존재들은 아니라는 것이죠.

 

영화 <다섯 번째 흉추>는 분명 불쾌한 영화입니다. 애초에 주인공이 침대 매트리스에 숨어 사람들의 흉추를 뽑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괴물 곰팡이니까요. 이를 묘사하는 형식 또한 없던 불쾌감을 끄집어내 북돋우면 북돋았지 감추거나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점점 번져나가는 곰팡이와 커져가는 매트리스 구멍, 음습하게 뻗어 나오는 촉수 따위의 그로테스크한 표현, 상식적이지 않은 인물들과 발버둥 치는 듯한 공간 묘사, 거슬린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관객을 괴롭히는 사운드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피에 젖은 뼈는 고역스러운 진입장벽임에 틀림없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니까 별로라는 감상은 시시합니다. 감독 또한 자신의 창작물이 불쾌감을 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왜 이런 불쾌한 영화를 만든 걸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때론 기쁨이나 환희, 즐거움, 감동 등의 긍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공포심이나 두려움, 불안감, 불쾌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들여다봄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자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죠.

 

 

 

 

 

 

# 2.

 

영화는 제목에서처럼 '흉추'에서부터 출발하는 데요. 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처음의 시퀀스에서 발표라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빌려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강 바닥에는 뛰어내린 수많은 사람들의 흉추뼈가 있고 영화는 그것을 각자의 비밀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합니다. 한강의 끝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고여있을까.

 

흉추는 그 자체로 죽은 사람들의 사연을 상징합니다. 우스갯소리로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삶의 고단함은 등골이 휜다라는 말로 비유되곤 하는 데요. 그런 등골이 빠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삶을 지탱하던 최소한의 의지를 잃고 무너져 내린 상황을 은유한다 이해할 수 있겠죠.

 

매트리스의 곰팡이는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흉추가 고여있는 모습의 의인화(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라 할 수 있습니다. 손을 뻗어 흉추를 뽑아내는 모습은 희생자들의 선택이라는 것이 짐짓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강한 폭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은유합니다. 매트리스는 잠을 자는 곳이고 그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최소한의 안전이 위협받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을 테구요, 흉추를 뽑아낸 등의 상처는 손이 잘 닫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방비하고 무기력한 이미지를 더합니다.

 

흉추만큼이나 중요한 미장센은 '내리막길'입니다. 첫 번째 시퀀스의 여자는 모퉁이 돌아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오는 것으로 등장해 내리막길을 쏟아지듯 내려가며 퇴장합니다. 이후의 서사 속에서 매트리스는 내리막길, 보다 정확히는 '하류'를 향해 흘러가고 고여갑니다. 중반 즈음 이런 엉망인 매트리스는 좀 버리라며 락카로 낙서를 하는 장면이 있는 데요. 그럼에도 매트리스는 폐기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영화는 매트리스를 둘러싼 사람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매트리스를 실은 차가 휘젓고 다니는 마을의 풍경입니다.

 

 

 

 

 

 

# 3.

 

사람들은 곰팡이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곰팡이 같은 존재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 전체가 매트리스 위에서 어떤 이유로든 생을 마감한 곰팡이들의 나열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죠.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여자가 기면증인 남자를 홧김에 죽이고 달아나는 상황, 두 번째는 모텔에서 헤어진 커플의 동반 자살, 세 번째는 보이는 그대로 병을 앓다 명을 다하는 환자, 네 번째는 격무에 시달린 끝에 생일날 졸음으로 변을 당한 운전기사라고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화면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번잡해진다는 점입니다. 자취방에서 모텔로 보호소로 승합차로 옮겨갈수록 세계는 단출해지고 앙상해지지만, 그 안은 더욱 화려해지고 복잡해집니다. 그 화려함과 복잡함이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착란적인 희망이자 죽기 직전의 화광반조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계층이 보기에는 그저 눈살 찌푸려지는 지저분한 곰팡이 무늬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신랄합니다.

 

결말에 이르러 고여 응축된 곰팡이가 버섯이 되어 자라 있는 모습이 무수히 많은 영정사진처럼 전시됩니다. 감독은 매트리스 뒤로 강물을 놓아 오프닝의 한강 이야기를 수미상관의 형식으로 받아냅니다. 가족을 걱정하는 지극히 평범한 편지를 읽게 만들어 이들의 삶이라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동시에 아주 극단적인 페이드 아웃을 통해 이 모든 존재들을 지나칠 정도로 멀고 사소하고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 격리시킵니다. 그 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절벽을 위치시켜 강력한 단절감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글의 도입에서 말씀드린 왜 이런 불쾌한 영화를 만든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말의 다섯 가지 이미지가 응집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다리 아래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무수히 많은 흉추들을 대하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거리감과 배타감과 선입견과 모멸감을 청각적으로 시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응축시킨 불쾌감인 것이죠.

 

 

 

 

 

 

# 4.

 

평을 찾아보면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사운드와 관련된 이야기 역시 적지 않은 듯합니다. 확실히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영화니까요. 인물들의 웅얼대는 대사가 무슨 소린지 궁금한 관객들은 몸을 앞으로 숙여 귀를 기울였을 겁니다. 그러다 불쾌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을 테죠. 이 같은 경험은 시각적으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영화를 몰입해 보다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는 몇몇의 장면에 놀라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이고, 영화 속 불쾌감이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면 이 같은 움직임 역시 감독의 의도라 추측하는 것은 썩 자연스럽습니다.

 

제목의 다섯 번째 흉추는 영화를 통해 등골이 뽑혀나가는 경제적 사회적 하층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격렬하게 앞뒤로 움직였을 관객의 다섯 번째 흉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합니다. 만약 제 추측에 감독의 의도가 있다면, 불쾌감에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모습이야 말로 그 자체로 영화의 존재 의의를 실천한다 할 수 있습니다. 관객을 타격함으로써 영화적 경험을 작품의 메시지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는 면에서 과연 도발적인 실험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 5.

 

끝으로 신랄한 계급론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기생충 같은 작품과도 착점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가장 큰 차이점은 이야기가 지나치게 앙상하다는 점입니다. 인물들은 다른 인물과의 접점 없이 각자의 에피소드 속에서만 존재하는데요. 제 아무리 자극적이라 한들 곰팡이에게 흉추를 빼앗기며 소비되는 패턴을 깨달아 버리는 순간. 관객은 시퀀스마다 10여 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등골 뽑히는 장면만 기다리는 꼴이 됩니다. 지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감상이 지나치게 단편화되어 지루한 상황에서 이미지만 과잉되어 버리면 그 효과까지 싸잡아 폄하되고 맙니다. 대다수 관객들과 달리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불쾌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루하다'는 점임을 지적할 수밖에 없겠군요. 박세영 감독, <다섯 번째 흉추>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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