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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허무의 얼굴들 _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감독

그냥_ 2023. 10. 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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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굳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허무의 얼굴들

 

 

 

 

 

 

 

 

마틴 맥도나 감독,

『이니셰린의 밴시 :: The Banshees of Inisherin』입니다.

 

 

 

 

 

# 1.

 

작게는 개인의 인생, 넓게는 역사를 포함한 온 우주를 허무하고 공허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그 자체로 세계의 허무를 상징한다 할 수 있죠. 영화는 좁게는 두 명, 넓게는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데요. 콜린 패럴의 파우릭 설리반, 브렌던 글리슨의 콜름 도허티, 케리 콘던의 시오반 설리반, 배리 키오건의 도미닉 키어니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허무에 대응하는 각기 다른 방식들을 대변합니다. 적극성을 기준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소극적인 사람부터 도미닉, 파우릭, 콜름, 시오반의 순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점층적 관계는 우울감이라는 말로 친절하게 표현됩니다. 도미닉의 눈에 파우릭은 우울한 사람, 파우릭의 눈에 콜름은 우울한 사람, 콜름의 눈에 시오반은 자신과 같은 우울함(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죠.

 

 

 

 

 

 

# 2.

 

'도미닉'은 '허무한 세계에 체념 한 채 헛된 희망을 꿈꾸는 인간'입니다. 벌거벗은 아버지의 모습과 피투성이 얼굴 따위는 인물의 허무하고 비극적인 인생을 상징합니다. 도미닉이 끔찍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량한 파우릭이 친구가 되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똑똑한 시오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희망의 달콤함과 위험함과 중독성과 거짓됨은 항시 손에 들린 밀주로 은유되고 있죠.

 

파우릭이 자신과 같은 처지(가족 문제로 인한 불행)의 사람을 농락했다는 부도덕을 확인하는 순간 도미닉은 크게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데요. 해당 장면의 대화만큼이나 밀주를 놓고 떠난다는 점, 그리고 그 밀주(로 은유된 허구적 희망)를 파우릭이 벌컥벌컥 마신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시오반마저 고백을 거절하고 섬을 떠나는 결말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 끊기는 순간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비참한 최후를 통해 재차 확인됩니다. 도미닉은 극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임에 분명한데요. 동시에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꿈꾸는 사람이자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시오반의 진가를 알아보는 순수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파우릭'은 '허무한 세계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의 다정함을 강요하는 인간'입니다. 바보 같고 쓸데없는 이야기와 적당한 술로 허무를 잊으려는 사람이죠. 대사를 통해 반복되는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의 다정함이란 철저히 자의적이고 이기적이고 때론 폭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거절하는 콜름을 제멋대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창문을 불쑥 들여다본다거나 마음대로 집안을 헤집는다거나 약속을 잡는다거나 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일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데요. 이는 타인이 자신의 다정함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인물의 폭력성은 상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불길을 통해 과격하게 표현됩니다.

 

거리낌 없이 음대생을 능욕한다거나, 떠나는 시오반의 이야기를 듣고 밥 걱정부터 하는 이기적인 인물인데요. 동시에 집을 태우면서도 개를 구하는 장면 등에서는 일정한 위선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만든 규칙안에서의 다정함을 위해 사과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공격한다는 면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전쟁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물이기도 하죠. 작품이 파우릭을 그리는 방식은 상당히 조롱조로 일관하고 있는데요. 그런 면에서 감독이 블랙 코미디를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3.

 

'콜름'은 '허무한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의미에 집착하는 인간'입니다. 파우릭과 어울렸지만 어느 순간 인생의 허무를 깨우쳐버린 인물인데요. 이를 저항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무언가를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젊은' 음악가들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모차르트를 거론하는 술집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파우릭을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손가락을 자른다는 것은 이 인물이 허무에 순응하는 것을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의 불완전함을 증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손가락을 자르면 바이올린을 켤 수 없으니까요. 이 인물에게 예술과 삶이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허무에 저항하는 듯한 착각을 제공하는 진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손가락을 자른 후 남은 한 손으로 허공에 바이올린을 휘젓는 모습은 인물의 모순을 폭로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죠.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파우릭이 좋다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술에 취한 파우릭과 인생의 허무에 대해 논쟁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의 파우릭은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사유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파우릭의 다정함이라는 것이 허무에 대한 무기력한 순종이 아닌 허무에 저항하는 또 다른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그것이 술에 취해 기억하지도 못할 헛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고뇌를 조롱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고, 이는 큰 모멸감이 되었을 겁니다. 분노에 차 모든 손가락을 잘라버린 이유죠.

 

'시오반'은 '허무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누리며 세계를 탐험하는 인간'입니다. 감독이 주장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이죠. 거의 유일하게 상식적인 인물이고, 위의 세 사람 모두에 대한 박애주의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경감과 잡화점 주인의 부도덕을 질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시오반에게 가장 중요한 설정이라면 역시나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배경이 1923년의 아일랜드다 보니 그녀는 영화 내내 느슨하게 무시되거나 차별받는 데요. 이는 당대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현대의 능동적 허무주의자를 연결 짓는 장치라 할 수 있겠죠.

 

콜름과 나눈 펍에서의 대화는 인상적입니다. 콜름에게 모차르트의 연대를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는 장면이죠. 콜름은 지성을 목적으로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무를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는 데 반해, 시오반은 예술과 지성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인물임이 대비되는 순간입니다. 결말에서 그녀가 더 넓은 세계의 도서관으로 가는 이유라 할 수 있죠.

 

 

 

 

 

 

# 4.

 

이 같은 인물 구도를 잡을 수 있다면, 그 외의 서사나 상징들이 훨씬 편안하게 잡히기 시작합니다. 파우릭과 시오반이 남매라는 것은 두 사람이 사상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구요. 결국 영화 내내 충돌하는 것은 파우릭과 콜름이라는 점 역시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란 '어떤 사람들이 싸워온 것인가'를 통찰하는 맛이 있죠. 두 사람의 갈등을 시오반이 중재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나, 잠시의 휴전은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 다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작품의 서사란 모든 인물에 대한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라는 감상으로 점철되어 있는 데요. 이 같은 감상 또한 허무한 세계의 절대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허무함과 싸우는 인간의 모순과 우매함과 가소로음을 조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각 인물들의 심리상태는 나귀나 개, 말 등의 동물에 비유되고 있기도 한데요. 이들의 갈등 서사가 우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할 수 있겠죠. 분노를 상징하는 불, 고통을 상징하는 피, 슬픔을 상징하는 물을 놓고 네 인물의 최후를 각각 물에 질식한 모습, 불에 휩싸인 모습, 피를 흘리는 모습, 물을 건너는 모습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제목에도 있는 '밴시'는 누가 죽을 것임을 울음으로 예언하는 신화적 존재인데요. 극 중에서는 불쑥불쑥 등장하는 노파를 통해 은유되고 있죠.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허무와의 싸움에서 달아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을 평범한 예언가가 아닌 굳이 울음으로 표현하는 밴시로 명명했다는 점에서 인간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 또한 일부 발견됩니다.

 

그 외에 경감은 허무한 세계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부는 허무한 세계에서 종교가 해온 역할은 무엇인가 지적합니다. 네 층위의 인물들 중 갈등을 유발하는 파우릭의 사주를 받는다거나, 종교를 의심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술가에게 주저 없이 저주를 내리는 모습은 강한 비판을 읽게 만들구요. 정작 가장 불행한 도미닉은 교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 역시 종교에 비판적인 뉘앙스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잡화점 주인은 언론의 역할을 지적합니다. 흥미를 위한 갈등으로서의 가십거리를 탐닉하고 프라이버시를 파해치는 것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은 통렬하죠. 그외에 배경이 되는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 맥락으로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 5.

 

허무한 우주를 살아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 고찰과 엮어 구체적 개인 간을 갈등으로 치환해 흥미로운 스릴러와 코미디로 구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나 이 모든 것들을 '가상의 섬 하나'와 '두 친구가 절교했다'는 간결한 서사에 입체적으로 녹여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죠.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네 주인공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하고 타인과 세계를 이해해볼 것을 제안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감독은 스스로를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것 역시 생각해 봄직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콜름이라 할 수 있겠죠. 영화의 제목인 '이니셰린의 밴시'를 작곡한 사람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손가락을 잘랐으면 잘랐지 나는 나의 예술을 하겠다며, 자신에게 적당한 다정함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시오반이 되지는 못한 사람이라는 면에서 일정한 자기혐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틴 맥도나 감독, <이니셰린의 밴시>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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