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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아이슬란드의 몽타주 _ 램,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

그냥_ 2023. 6.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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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는 단순함에도 여러 가지 알레고리가 동시에 읽히거든요. 순리와 부정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이민과 혼혈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될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 신화의 비틀린 재해석 같은 맛도 있군요.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

『램 :: Dýrið입니다.

 

 

 

 

 

# 1.

 

우선 첫 번째, 순리와 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작품은 스스로를 [프레임]으로 소개한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해당 코드를 강조합니다. 양 한 마리씩 들어있는 울타리라거나, 공간을 위계로 구분 짓는 긴 복도, 안팎을 분리하는 문틀과 창문틀, 하다 못해 부부가 타고 다니는 트랙터 운전석까지 모두 프레임이죠. 심지어 잉그바르와 마리아의 집이라거나 최종적으로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이 모든 영역들을 프레임이라 규정합니다. 프레임은 작품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활용되곤 하는데요. 통상 통제와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겠으나, 역으로 인물이 가진 정체성을 비롯한 전혀 다른 의미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죠.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은 프레임을 순리(順理)라는 개념의 상징으로 활용합니다. 양은 마땅히 우리 안에서 키워지고, 양치기 개는 마땅히 양치기 옆에 있고, 고양이는 마땅히 집 안에서 크고, 사람은 마땅히 이들을 돌보는 식이죠. (왜 꼭 그러해야 하는가라는 식의 자유주의적 가치판단은 작품에서 배재된 것으로 합의됩니다.) 양은 자라고 때가 되면 새끼를 뱁니다. 새끼를 낳으면 묻어 나오는 잔여물은 어미가 핥아냅니다. 새끼는 자기 배로 낳은 어미가 기릅니다. 그것이 순리죠.

 

 

 

 

 

 

# 2.

 

도입부 울타리를 벗어나 복도에 쓰러진 양 한 마리는 순리를 벗어난 존재가 등장할 것임을 느슨하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언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듯 양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진 새끼가 태어나게 되고, 부부는 어미 양에게서 분리해 집으로 데려갑니다. 부부는 그 존재에게 '아다'라 이름 붙이는데요. 이후 3장의 시작과 함께 이 이름은 부부가 오래전 잃은 아이의 이름이라는 것이 확인되죠.

 

아이의 이름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종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점입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순리입니다. 새로운 아다는 그의 괴기한 모습과 전혀 무관하게 순리에 거스르는 존재라는 것이죠. 캐릭터의 과격한 디자인은 그저 순리에 벗어났음을 직관적인 형태로 과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설령 사람이 낳은 사람의 아이라 하더라도. 그를 이미 죽은 아이의 대용으로 활용하는 식의 순리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비극을 맞이했을 겁니다.

 

아다의 모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관련해 부부가 아다를 캐어하는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통상은 양의 부분을 숨기고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일 텐데요. 반복적으로 사람의 몸을 이불로 덮어 가리고 양의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죠. 부부에게 양이냐 사람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아다가 온전한 행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부부 역시 은연 중에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만, 그런 현실 일체를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일련의 모순을 직시하는 순간들은 작품 속 고뇌와 불안과 악몽과 눈물을 통해 착실하게 누적됩니다.

 

 

 

 

 

 

# 3.

 

전반부 즈음 시간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남편은 지금 불만이 없으니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답합니다. 반면 아내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죠. 시간 여행이란 것은 순리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일련의 대화는 두 인물이 순리를 대하는 태도를 대비시키기 위한 장면으로 이해하면 무난합니다.

 

미래가 궁금하지 않은 남편은 순리를 인정하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아다를 받아들였던 것은 그것이 아내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뿐이죠. 순리를 부정까지 하진 못하지만 고개를 파묻고 몸을 돌려 '외면'하고 있는 셈인데요. 아다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는 형의 일갈에 차마 대꾸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은 인물이 가진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줍니다. 반면 과거를 상상하는 아내는 순리를 적극적으로 '부정'합니다. 실제 어미 양을 죽여 파묻는 등 대부분의 적극성을 아내가 독점하는 이유죠. 그리고 이 같은 순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두 사람을 다른 결말로 이끌게 됩니다.

 

앤딩에서 남편은 아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데요. 뒤로는 산이 있다느니, 강은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라느니 하는 내용이었죠. 순리를 외면하던 사람이 자연의 순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외면하고 있던 자기모순을 자백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치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 속에서 죽음 역시 순리라는 점입니다. 남편은 죽었지만 최소한 죽음으로 인해 순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이죠. 그에 반해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순리의 부정이라는 지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로도 영원히 '새로운 아다'와 '새로운 남편'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라 추측하는 이유죠.

 

 

 

 

 

 

# 4.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안개와 폭우, 폭설 따위는 순리를 거절하는 부부의 음습한 인식을 은유합니다. 부부가 순리의 거절에 점점 더 잠식될수록 집 근처에 드리우는 안개와 빗방울이 따라 커지는 식이죠. 요소요소에 인서트 되는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그런 폭력적인 자연현상에도 가려지지 않는 순리를 상징합니다. 각각의 인서트 컷은 아내의 꿈자리를 어지럽히는 악몽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죠.

 

피에튀르는 남편의 형인데요. 형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아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순리를 '외면'합니다. 그가 외면하던 순리란 동생의 아내인 마리아를 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추파를 던지다 끝내 아다와 관련된 비밀을 볼모로 협박하기에 이르지만 결국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순리를 '외면'하던 잉그바르와 달리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집을 떠난 피에튀르였기에 비극적인 운명만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세 주인공은 순리를 인정한 사람(피에튀르), 순리를 외면한 사람(잉그바르), 순리를 부정한 사람(마리아)의 나열이라 할 수 있겠네요.

 

구분해야 할 것은 순리의 부정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집일 뿐이죠. 형이 아다를 데리고 외출하자 부부는 섹스를 즐깁니다. 화목하게 식사도 나누죠. 그 순간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 보입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라는 사실은 전혀 훼손되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순리를 거스름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 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함을 지적하기 위한 시퀀스라는 것이죠.

 

 

 

 

 

 

# 5.

 

여기까지 순리의 부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드렸는데요. 보기에 따라선 이민자 문제처럼 보이는 맛도 있습니다. 인간은 아이슬란드의 원주민, 양은 이민자라는 것이죠. 아이가 없는 원주민은 2세가 필요합니다. 원주민은 이민자를 위해 건초라는 소득과 번호표라는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원주민과 이민자는 함께 사는 듯 보이지만 공간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양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가 태어납니다. 혼혈이죠. 순수 이주민은 사회로의 편입이 거부되지만 혼혈의 입양은 허락됩니다.

 

아내는 아이슬란드의 이민 정책을 대변합니다. 남편은 그것이 국가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주장에 느슨하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형은 우려를 표하는 사람 즈음 될 테죠. 집으로 돌아온 형에 대해 부부는 '오해'를 샀거나 '빚'이 있거나라 말하는 데요. 이민 문제에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국가의 부채 따위로 해석한다면 무난하겠죠. 이민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결국 쫓겨납니다. 이민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성장한 혼혈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아이슬란드 아이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아이(아다)마저 장성한 이민자에게 빼앗기고 나면, 주변에 누구도 남지 않은 아이슬란드(아내)만 외롭게 남겨질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결말이죠.

 

세 사람이 공유하는 문화로서 스포츠라거나 음악, 역사, 추억 따위에 공감하지 못하고 겉도는 아다의 모습은 이 같은 해석에 무게감을 더합니다. 반복적으로 연출되는 물이나 거울에 비친 얼굴 따위 역시 작품을 정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읽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고 있죠.

 

 

 

 

 

 

# 6.

 

혹은 종교 코드의 호러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설에 등장하는 바포메트처럼 숫양은 흔히 악마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것에 착안하는 것이죠. 도입에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라디오를 통해 등장한다는 점과, 하필 엄마의 이름이 '마리아'라는 점, 죽은 아다의 묘를 묘비가 아닌 십자가로 세웠다는 점 또한 기독교적 해석에 기여합니다.

 

(갑론을박이 있긴 합니다만) 흔히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도입에서 설원에 방치된 말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마구간을 빼앗은 양(악마)의 집에서 예수 대신 태어난 악마의 탄생처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부활한 악마를 돌보는 조건으로 거짓된 망상이라는 행복을 준 것이고, 악마와 계약한 자의 영혼이 타락해 가는 모습이 악몽에 등장하는 하얀 눈의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라 해석하면 얼추 그럴싸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푸른 옷을 입은 엄마의 영화 포스터는 성서화 <성모와 아기 예수>에 대한 강한 오마주처럼 보이죠.

 

# 7.

 

대충 세 가지 코드에 대해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코드가 아이슬란드의 단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 아이슬란드는 '대자연이라는 순리와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자, '이민과 관련된 현실적 문제를 가진 나라'이며,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간결한 서사, 도발적인 아이템, 스타일리시한 표현의 이면에 다양한 레이어를 녹여내면서도, 그 레이어들이 자연스럽게 아이슬란드를 포토몽타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색적인 감동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 <램>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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