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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Ecology & Exploratory

상생의 역사 _ 아기 코끼리와 노부부, 카르티키 곤살베스 감독

그냥_ 2023. 2.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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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필연의 상처를 회복케 하는 상생의 역사

 

 

 

 

 

 

 

 

카르티키 곤살베스 감독,

『아기 코끼리와 노부부 :: The Elephant Whisperers』입니다.

 

 

 

 

 

# 1.

 

남인도 타밀나두 주에 위치한 무두말라이 호랑이 보호구역.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야생 인접 인도코끼리 캠프, 테파카두 캠프. 그 속에서 '숲의 왕들'이라는 뜻을 가진 카투나야카르 족 사람들이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라구와 암무라는 이름의 두 아기 코끼리를 돌보는 관리인 봄만, 벨리 부부를 중심으로 따라갑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가치는 상생相生입니다. 자연과 생명의 상생이자, 인간과 동물의 상생이며, 부모와 자녀의 상생이자, 노인과 아이의 상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할하는 존재와 역사와 문화와 공간의 상생인 것이죠. 인간의 길을 인간과 함께 걷는 코끼리를 부감으로 잡은 후, 자연의 길을 코끼리와 함께 걷는 인간을 부감으로 잡아 교차편집하는데요. 일련의 오프닝은 작품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겠죠.

 

영화는 대조적인 요소들이 경계를 넘어 함께 사는 이미지를 성실히 누적합니다. 코끼리 목에 걸려 울리는 종소리는 관계와 소통 등의 뉘앙스를 청각적으로 구체화합니다. 축제를 앞두고 코끼리에 그리는 문양과 축하의 화관은 문화와 삶의 영역이 어우러지는 순간을 시각화합니다. 숲을 존중해 맨발로 다닌다는 부족의 전통 역시 비단 코끼리뿐 아니라 이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엿보게 하죠. 단장 한 코끼리들이 신화 속 지혜와 행운의 신 '가네샤'의 축복을 받는 장면을 보노라면, 이 사람들이 누리는 상생이란 가치관 등의 사고방식이나 체계를 넘어 그 자체로 종교이자 문화로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가늠키 어려운 깊은 뿌리인 것이죠.

 

카투나야카르 족이 살아내는 상생이란 일반의 생각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처럼 보입니다. 구분된 존재들 간의 공존共存을 넘어선 경계의 붕괴에 가깝죠. 너와 내가 따로 있고 인간과 동물이 따로 있고 생명과 자연이 따로 있어, 단호하게 구분된 것들이 각자의 영역을 유지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접촉되어 있는 수준이 아니라, 각자의 물리적 정서적 역사적 경계를 오랜 시간 붕괴시켜 온 역사의 풍경은 생경하지만 그래서 감동적입니다.

 

 

 

 

 

 

# 2.

 

가치관 등의 사고방식이나 체계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이자 문화라 말씀드린 것처럼 영화가 그리는 상생이란 단순한 지향점이 아닙니다.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죠. 상생하는 삶이 상생하지 않는 삶보다 더 형이상학적이라거나 가치지향적이라거나 이익이 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약간은 우위의 존재들이 베푸는 시혜적인 시각에서 묘사되는 것이 익숙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상생이란 그저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방식일 뿐이죠.

 

작품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상처받은 존재들, 보다 정확히는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로 정의합니다. 상처와 상실은 필연이자 순리의 영역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기에 불행한 사건들 역시 특별한 누군가의 특별한 경험이 아닌 것으로 소화됩니다. 상처를 극복케 하는 상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작품에서, 상처가 특별한 경험이 된다면 상생이라는 것 역시 특별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만을 위한 조건부로 폄하될 겁니다. 반면 상처가 살아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리의 영역이라면 상생이라는 것 역시 삶을 지탱하는 일상으로서 보다 폭넓게 포용하게 되겠죠.

 

아기 코끼리가 혼자된 것은 그저 사고에 불과하구요. 여름이 와서 먹을 게 줄어들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벨리가 전남편을 잃었던 이유는 호랑이에게 우연히 변을 당했기 때문이구요. 결말에 이르러 라구와 헤어지게 되는 것 역시 부당하고 억울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순리의 영역처럼 묘사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 3.

 

상처가 필연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의미합니다. 불완전성은 생에 대한 겸허한 태도로 확장됩니다. 상처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위계는 없습니다. 보호는 언제나 상호적입니다. 노부부는 누구보다 지극정성으로 코끼리를 보호하지만 누구보다 더 많이 코끼리로 인해 치유받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만 보면 한 30년은 산 노부부처럼 들리는 데요. 사실 두 사람은 근래에 결혼했다 합니다. 계기는 아기 코끼리를 보호하는 것이었구요. 이미 완성된 가족이 코끼리를 돌본 것이 아니라 코끼리로 인해 완성된 가족이라는 역설은 다큐멘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순환과 불완전성과 겸손의 성격을 분명히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노부부, 그들의 아이인 두 코끼리, 그 아래로 다시 다른 코끼리를 보호하며 살아나갈 어린 손녀 산자나가 한 가족으로 어우러지는 모습에는 신비로운 울림이 있습니다.

 

작품의 후반부는 코끼리 '라구'를 키우던 중 5개월 차 새끼 코끼리 '암무'를 들이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처음엔 암무를 질투하던 라구는 점점 암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처음 라구와 노부부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관객은 이야기를 '코끼리를 키우는 관리인'의 구도로 이해했을 겁니다. 반면 암무를 들이는 과정에서는 '둘째 아이를 얻게 된 가족'으로 인식했을 겁니다. 짧은 시간 사이 관객이 느끼는 이 인식의 차이는 그 자체로 다큐멘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크게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일련의 순환은 새롭게 코끼리를 돌보게 될 부족의 어린아이들이 강에서 뒤엉켜 코끼리를 돌보는 모습으로 멋들어지게 확장됩니다. 물보라 아래 환한 웃음은 그 자체로 장관이죠. 카르티키 곤살베스 감독, <아기 코끼리와 노부부>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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