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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나란 무엇인가 _ 존 말코비치 되기,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냥_ 2022. 8.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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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당신은 어째서 자신이 존 말코비치가 아니라 확신하는 거지?

 

 

 

 

 

 

 

 

스파이크 존즈 감독,

『존 말코비치 되기 :: Being John Malkovich』입니다.

 

 

 

 

 

# 1.

 

"자아의 성질과 영혼의 실존 말이야. 내가 과연 나일까? 말코비치가 말코비치일까?... 이 관문이 얼마나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인지 모르겠어."

 

영화의 착점을 상징하는 대사이자, 크레이그의 입을 빌린 감독 스스로의 선언과도 같은 대사입니다.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피곤한 작품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스파이크 존즈가 가장 잘 알고 있죠.

 

몇몇의 변태 같은 관객을 제외한 대부분은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합니다. 영화 따위 두어 시간 동안의 오락거리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죠. 테마를 이야기하기 앞서 장르적으로 보자면, 감독은 스스로 설정한 이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 안으로 평범하고 무던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서른 살 남짓 젊은 감독의 호기로운 도발은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철학적 주제를 대중 영화로 녹여내는 데 있어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라 할법하죠. 이후 스파이크 존즈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게 될 '인간 탐구'는 시작부터 이렇게나 깊었습니다.

 

# 2.

 

공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점점 좁고 불편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들어가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처음의 크레이그는 인형극 무대라는 세상을 신이라도 된 듯 내려다봅니다. 이내 침대에 퍼질러진 개인으로 추락하죠. 다음은 거리의 귀퉁이로 내몰리구요. 구직을 위해 찾은 7과 1/2층은 층고가 낮아 고개를 숙여야 하는 특별히 불편한 공간이죠. 다시 이야기는 사무실 구석에 숨겨진 '더' 좁고 '더' 불편한 터널로 전개됩니다. 그렇게 터널을 통해 들어간 말코비치의 내면은 가장 좁고 불편한 골치 아픈 공간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 모두 최선을 다해, 심지어 돈을 지불해서라도 그 불편한 공간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를 향해 점점 몰입해가는 관객들의 모습도 이들과 다를 바 없죠.

 

 

 

 

 

 

# 3.

 

정체성을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논하기 마련입니다. 외면하고 있었던 혹은 무시되고 있었던 혹은 발견되지 않았던 정체성을 발견함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자신을 목격하는 여정.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지나간 시간의 의미와 나아갈 생의 가치를 반추하는 식이죠. 하지만 <존 말코비치 되기>는 관객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건넵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과연 특별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건 상대적으로 부정확한 나에서 보다 정확한 나를 향하는 일종의 방향성을 가진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부정확한 나는 부정확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고, 탐구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전의 부정확한 나라는 돌아갈 곳은 존재하죠.

 

반면, '나란 무엇인가'가 질문이 되어버리면 양상은 전혀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위상의 '나'들 사이를 배회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만약 내가 지금 인지하고 있는 나가 온전한 나가 아니라면 삶을 지지하는 가장 밑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위험에 노출될 겁니다. 이를테면 존 말코비치를 경험한 직후 로테가 보이는 급격한 혼란처럼 말이죠. 영화는 상당히 코믹하고 판타지적이며 일견 서정적이고 멜로적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서 호러의 분위기도 함께 풍기는 것은 무의식보다 더 밑바닥을 받치고 있는 '나'라는 관념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4.

 

인지하는 나. 감각하는 나. 평가하는 나. 갈망하는 나. 사랑하는 나. 통제하는 나. 행동하는 나. 정신적인 나. 육체적인 나. 논리적인 나. 성적인 나. 사회적인 나. 관계적인 나. 과정으로서의 나. 의식하는 나. 무의식하는 나...

 

작품을 통해 묘사되고 탐구되는 '나'는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텐데요. 물론 통상의 개인은 위의 분류처럼 자아를 분리해 인지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개인은 인지하는 동시에 감각하고 평가하며 갈망하고 행동하고 관계하고 과정을 독점하고 의식하며 무의식하고 있죠.

 

반면, 7과 1/2층의 터널이 있는 스파이크 존즈의 세상에서 '나'는 분화되고 선별되고 재조립됩니다. 200달러를 내고 서비스를 이용받는 '인지하지만 행동할 수 없는 나'들과, 존 말코비치의 몸을 통해 정체성을 발견하는 로테로 대표되는 '행동할 수 없으나 감각하고 의식하는 나', 존 말코비치의 몸을 지배하는 데 성공한 크레이그의 '인지하고 감각하고 행동하지만 세상에겐 말코비치로, 맥신에겐 로테의 대용품으로 받아들여지는 나', 혹은 '자신의 무의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타인과 타인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나'를 지나 심지어 '같은 몸뚱이 안에서 서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무수히 많은 나'들''까지 나아갑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존 말코비치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나'들이 분화되며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이 명확한 독립된 시행이라는 점과 15분이라는 통제된 숫자가 일련의 과정을 사회과학적 실험처럼 보이게도 하는데요. 수많은 다각적 실험값들을 도출해내는 도구로서 [타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터널]이라는 간단명료한 실험 도구를 고안했다는 것은 천재적이라고 밖엔 달리 말할 수 없는 거겠죠.

 

 

 

 

 

 

# 5.

 

이 골치 아픈 정체성 찾기의 백미는

일련의 과정에 Being John Malkovich 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존 말코비치가 되고 싶었던 로테는 결국 로테로 되돌아옵니다. 존 말코비치의 모습을 한 로테를 사랑한다 말하던 맥신 역시 로테의 모습을 한 로테에게로 돌아갑니다. 존 말코비치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었던 크레이그는 존 말코비치의 몸은커녕 로테와 맥신의 아이 에밀리의 인식 안에 갇히고 말았죠. 영생을 꿈꾸던 선장과 친구들이 존 말코비치의 몸을 차지하긴 하지만 이건 그리 중요하진 않습니다. 영생이라는 허구적 목표에다 판타지적 조작을 짬처리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존 말코비치를 통해 정체성을 탐구하고 실현하려던 이들 모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레이그와 로테와 맥신과 존 말코비치를 포함한 그 어떤 사람이 들어가 있는 그 어떤 순간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존 말코비치의 얼굴을 하고 있는 각기 다른 존 말코비치일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지하는 나, 감각하는 나, 평가하는 나, 갈망하는 나, 사랑하는 나, 통제하는 나, 행동하는 나, 정신적인 나, 육체적인 나, 논리적인 나, 성적인 나, 사회적인 나, 관계적인 나, 과정으로서의 나, 의식하는 나, 무의식하는 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나는 나가 아닌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것(Being John Malkovich)에 불과합니다. 모든 자아를 오롯이 독점할 때야 말로 비로소 온전한 나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달리 말하면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설령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인지와 감각과 평가와 갈망과 행동과 관계와 인식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한다면 '나'의 모습만 하고 있을 뿐 '나'가 아니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따라 사랑하고 말하고 평가하고 행동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누군가의 끈에 매달린 인형, '존 말코비치'가 되어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6.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로테가 키우는 동물들은 다소 비하적인 의미가 포함된 낮은 차원의 존재에 대한 은유라 보는 것이 무난할 텐데요. 감옥을 스스로 탈출하는 원숭이와, 감옥에 갇혀버린 크레이그의 대조는 난해한 작품의 끝에 원하는 통찰로 관객을 안내하기 위한 감독 나름의 친절이라 이해한다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선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전개됨에도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장르적으로만 풀어내다 보니 화두만 툭 던져둔 것 같은 느낌도 조금은 있습니다. 약간은 염세적인 맛도 있구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레 시니컬하게 보는 거리감도 있는데, 하긴 이게 스파이크 존즈지... 싶은 생각은 처음 영화를 봤던 당시에나 다시 보는 지금에나 하게 되는군요. 문득 '나'라는 글자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와 읽으시는 데 불편하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피해보상 청구는 감독에게 보내시는 걸로 하죠. 스파이크 존즈 감독, <존 말코비치 되기>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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