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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같은 개, 다른 목줄 _ 엘 모비미엔토, 벤자민 나이쉬타트 감독

그냥_ 2021. 12.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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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1835년, 지도자를 잃은 아르헨티나는 혼돈 그 자체였다. 야심 찬 세뇨르는 고립된 남부 사막 팜파스로 자신의 거점을 옮겨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실험에 착수한다. 질서와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하던 세뇨르는 공포의 독재자로 서서히 거듭난다.

(제16회 전주 국제영화제)

 

 

 

 

 

 

 

 

'벤자민 나이쉬타트' 감독,

『엘 모비미엔토 :: El Movimiento』입니다.

 

 

 

 

 

# 1.

 

1835년 무정부 상태의 아르헨티나입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다시피 기본적으로 정치적 소재의 작품이죠. El은 영어의 The와 같은 정관사구요, Movimiento는 예상하셨다시피 Movement의 스페인어니까 (정치-사회적) 운동 정도로 이해하시면 무난할 겁니다. 국가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파편적으로 흩어진 군부 잔당들에 의한 농민 수탈이 만연하던 팜파스 Pampas 지역을 배경으로, '세뇨르'라는 인물이 정치 공동체 실험을 시도합니다.

 

영웅 서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인물을 통해 당대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적 환경을 조소하는 작품이라 보는 편이 적절할 겁니다. 포스터만 보더라도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듯한 고상한 의자에 다리 꼬고 앉은 과시적 자세와는 달리 공간은 아무것도 이루어진 바 없는 허무한 평야입니다. 뒤로 부하가 들어 올리는 깃발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죠.

 

 

 

 

 

 

# 2.

 

세뇨르와 그를 따르는 두 부하, 그중에서도 특히 세뇨르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단출한 배경, 평이한 서사, 문학적 수사, 건조한 표현이라는 네 축 위로 주인공의 화려한 언변과 표정에 담긴 카리스마를 실현하는 것에 주력합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씬에 세뇨르가 나온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추적인 인물인데요. 구태여 '거의 모든'이라 말씀드린 이유는 세뇨르가 등장하지 않는 시퀀스가 '딱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시퀀스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작품을 두괄식頭括式 영화라 이해했습니다. 이후 세뇨르의 서사란 본질적으로 처음의 '극악무도 대포 강도단'의 약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작품이라는 거죠. 다소 난해하기도 한 이 작품의 맥을 편안하게 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첫 번째 시퀀스를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 3. 

 

대부분이 공감하실 것 같은데요. 영화는 시작부터, 좋게 말하면 이질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지루합니다.

 

누군지도 소개받지 않은 남자가 황량한 초원 한가운데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립니다. '무엇을 찾고 있구나.' 라는 이미지만 수분에 걸쳐 전달한 후 관객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작은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팜파스를 배회하며 페이스트리를 팔아 연명하는 농부의 목소리죠.

 

어슬렁 거리며 다가간 남자는 농부의 뒷덜미를 움켜쥐는데요. 움직임이 마치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보입니다. 포식자의 안광을 가진 자가 초식동물의 뒷덜미에 송곳니를 꽂아 넣습니다. 행동대장이 사냥감을 제압하자 무리의 두목인 듯한 노인이 텐트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주변인들은 이 노인을 '대령'이라 부르는데요. 곧이어 앞서의 남자가 '나라에서 군인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불평하는 것까지 함께 생각하면, 이들은 패망한 군부의 잔당인 듯합니다. 이름 대신 불리는 호칭은 리더가 권위의식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엿볼 수 있게 합니다.

 

 

 

 

 

 

# 4. 

 

농부는 전염병과 원주민에 의해 식솔을 모두 잃었다 말하는데요. 대령은 전혀 아랑곳 않고 '동지를 죽인 적군에서 보낸 첩자'라 몰아세웁니다. 분노한 부하가 농부를 죽이려 하자 대령은 잠시 멈춰 세운 후 말에 메단 대포를 가져와 잔혹하게 처형합니다. 자존감을 자위해 줄 격식과, 명분을 제공해줄 당위에 대한 강한 집착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합리화한다 하더라도

이 폭력의 의의는 '약탈'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죽은 농부의 시체에 천천히 몰려드는 군인들의 모습이 스케빈징을 위해 모여드는 하이에나떼인 것만 같아 보입니다. 행동대장은 다른 부하들에게 농부가 팔던 페이스트리를 나눠 먹으라 지시합니다. 결국 이 시퀀스는 페이스트리로 시작해 페이스트리로 끝난다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를 메운 '군인'과 '첩자'와 '처형'과 '격식' 따위는 당사자들이 그 어떤 명분으로 치장한다 하더라도 허울에 불과합니다.

 

 

 

 

 

 

# 5.

 

그렇게 첫 번째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제목이 나옵니다. 엘 모비미엔토. 이 제목은 단순히 작품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대포 강도단의 약탈과 이후 세뇨르의 서사를 같은 위계에서 분리하는 기능도 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세뇨르의 서사는 오프닝 시퀀스와 거의 똑같은 논리구조로 전개됩니다. 톤만 조금 더 '정치적'일 뿐이죠. 세뇨르 등은 먹잇감을 찾아 긴 시간 팜파스를 배회합니다. 먹을 것을 가진 희생자를 찾아 회유의 형식을 빌린 협박을 제안합니다. 동의하면 약탈하고 거부하면 제거하는 와중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자위하는 온갖 합리화와 거짓, 위선과 폭력을 전개합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죽음과 약탈당한 무언가의 빈자리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강도단이 아무리 우겨댄다 하더라도 자랑스러운 군인이 될 수 없듯, 세뇨르가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진정한 의미의 정치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 6.

 

런타임 대부분은 세뇨르라는 캐릭터에 깊이를 축적하는 은유의 나열에 투자됩니다. 상대만 농부에서 부랑자로, 원주민으로, 지하 공동체로, 교인으로 교체될 뿐입니다. 은유는 대체로 친절합니다만 그 대신 단편적이기도 합니다.

 

정치 공동체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하는 농부를 재갈이 풀린 말에 비유합니다. 속도감을 살려 옆으로 달리는 대신 카메라 방향으로 달려오도록 동선을 연출해 관객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추궁합니다. 살의 이미지를 담은 빵, 피의 이미지를 담은 물, 가족과 재산의 이미지를 담은 소를 약탈품으로 설정했다는 것도 작품에 관념적 뉘앙스를 더하구요. 전염병이 든 부랑민 캠프에서 보이는 비겁함이나, 자신들의 폭력을 타인의 짓 인양 비판하는 대목등에서의 비열함은 직설적으로 전달합니다.

 

마음껏 나팔을 불던 자신과 달리 노래를 부르고 타악을 두드리는 타인에겐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등 독선적인 면모도 차곡차곡 강화됩니다. 어둠 속에서도 더욱 어두운 세뇨르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들고 있는 소녀의 대조는 주제의식을 엿보게 합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강가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절규하는 대목은 주인공의 광기를 상징하는 대사라 할 수 있겠죠.

 

 

 

 

 

 

# 7.

 

감독은 세뇨르에 투영된 정치 지도자의 편엽함, 독선, 폭력 등을 조롱하고 질타합니다. 마지막 연설을 앞두고 보이는 온갖 추태는 특히 노골적이죠. 피로 물든 검은 옷을 부하들과 함께 억지로 벗어던지고 하얀색으로 탈색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연설의 내용보다 그려 만든 콧수염과 제스처 따위에 열중하는 모습은 한심합니다.

 

연설을 앞 두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듭니다. 세뇨르의 연설은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됩니다.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이 불쾌감을 한층 드높입니다. 연설은 바스트 샷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이사이 청중의 클로즈업이 인서트 합니다. 세뇨르의 연설 능력을 과시하는 연출이죠. 아버지를 잃고 먼 길을 건너온 소녀는 세뇨르의 선동 앞에 증오에 가득 찬 사람, 실성한 사람이 됩니다. 소녀는 흐느끼지만 말하지 못합니다. 정치의 어둠 속에 희생된 소녀의 목소리는 낮의 대중에게 닿지 않으니까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상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선동가의 기만과 현혹 앞에 무력한 대중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우화라는 점에서 세뇨르 개인보다는 정치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편안할 겁니다. 결국 영화의 서사란, 강도단으로 대표되는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정치의 등장이라는 것이 결과론적으로 같은 개에게 메다는 다른 목줄일 뿐이라 축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곧 아나키즘에 대한 메시지로 귀결된다 할 수 있겠네요.

 

 

 

 

 

 

# 8.

 

스릴러에서 블랙 코미디로 제법 능숙하게 변주되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딱딱하고 지루한 작품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배경을 최대한 단순화한 대신 캐릭터를 풍부하게 묘사해 대조를 극단적으로 강화, 강력한 연극적인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합니다만, 그럼에도 불친절하고 위화감이 심한 작품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논외로,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 필요했기로서니 너어어어어어어어무 어둡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아무리 건조한 호흡이 필요했기로서니 너어어어어어어어무 느리다는 것 역시 치명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작품에 거부감이 별로 없는 편이라 썩 즐겁게 봤습니다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추천하기 힘든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고상떠는 '영화제 출품작스러운 작품'이랄까요. '벤자민 나이쉬타트' 감독, <엘 모비미엔토>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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