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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바보에게 바보가 _ 스몰 타임 크룩스, 우디 엘런 감독

그냥_ 2021. 7. 2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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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He is arrogant. Like all people with timid personalities, his arrogance is ­unlimited. Anybody who speaks quietly and shrivels up in company is unbelievably ­arrogant. He acts shy, but he’s not. He’s scared. He hates himself, and he loves himself, a very tense situation. To me, it’s the most embarrassing thing in the world—a man who presents himself at his worst to get laughs, in order to free himself from his hang-ups. Everything he does on the screen is therapeutic. - George Orson Welles -

 

우디 앨런은 거만하다. 소심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오만함엔 끝이 없다. 조용히 말하고 구석에 움츠러드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만하다. 수줍은 듯 행동하지만 사실은 겁에 질려 있다. 그는 자신을 혐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내게 있어 자기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의 흠결을 드러내 남을 웃기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스크린에 펼쳐놓는 모든 일들은 자기 치료를 위한 것이다. - 조지 오슨 웰스 -

 

 

 

 

 

 

 

 

'우디 앨런' 감독,

『스몰 타임 크룩스 :: Small Time Crooks』입니다.

 

 

 

 

 

# 1.

 

우디 앨런은 재수 없는 영감탱이입니다.

 

매번 말랑말랑하고 로맨틱한 이야기 속에 들어앉아 삐딱하게 짝다리 짚고서 염세주의 메시지를 토해내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이 인간이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긍부정을 떠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체성이 여럿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반대로 이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비밀리에 선행을 해오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을 겁니다. 다리 여덟 개 달린 문어모양 외계인이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만하다 생각했을 테죠.

 

여하튼 익히 알려진 성추문들을 저지르는 동안 그는 일련의 행동들이 자기 파괴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동시에 자기 파괴라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그런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자기애가 넘쳐나는 오만한 인물이기도 하죠.

 

 

 

 

 

 

# 2.

 

" 드높은 이상에 비해 현실은 시궁창이야.

그러니까 지랄 말고 시궁창 속에서 만족하고 살아. "

 

는 우디 앨런이 평생에 걸쳐 시종일관 구현해 온 메시지입니다. 호들갑을 떨자면 그의 모든 작품들은 이 메시지의 편집증적 반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자신이 만든 폭력적 메시지를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하게 적용한다는 면에서 자기혐오와 연민이 묻어나는 창작자이기도 합니다만, 동시에 이 비루한 메시지가 마치 인류 보편의 것이라는 걸 아득바득 증명하려 든다는 점에서 졸렬하고 방어적인 쫄보이기도 합니다.

 

시궁창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이성과, 드높은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감수성과, 이를 낭만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문학적 천재성을 함께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테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들을 드라마 등 여타 다른 장르가 아닌 '코미디'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참 부끄러운 인격이기도 합니다. 역시 오슨 웰스의 통찰은 탁월하달까요.

 

 

 

 

 

 

# 3.

 

본론으로 돌아와 볼까요.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에는 시종일관 두 개의 정체성이 등장합니다.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 고유의 정체성과, 간절히 가지고 싶어 하는 이상적 정체성이죠. 주인공 레이는 멍청한 좀도둑이지만 천재라는 이상적 정체성에 집착합니다. '브레인'이라는 별명에 담긴 조롱조차 읽지 못할 만큼 멍청하고 실상을 듣고도 인정하지 못할 만큼 완고한 인물이죠. 아내 프렌치는 상류층 문화에 편입되는 것을 꿈꾸는 스트리퍼 출신 네일숍 직원입니다.

 

지상에선 쿠키를 팔고 있지만 지하에선 일확천금을 위한 터널이 뚫리고 있구요. 돈이 쏟아져 나와야 할 구멍에선 물이 쏟아져 나오고, 벽을 뚫고 넘어간 곳엔 엄한 옷가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내의 사촌 메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 한 채 tv에서 들은 말만 반복하구요. 경찰복을 입은 남자는 범인을 체포하는 대신 프랜차이즈를 제안합니다. 이후로도 작중 인물과 요소 모두 [비루한 현실]과 [욕망적 이상]이라는 두 정체성을 두고 끊임없이 괴리됩니다. 

 

 

 

 

 

 

# 4.

 

서사는 <소시민이 우연히 큰 성공을 경험한 후 한눈팔다가 쫄딱 망하고 정말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확인한다> 라는 내용의 무던한 드라마입니다만, 그 안에 담긴 전개의 원리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현실의 정체성은 언제나 성공을,

허구적으로 만들어 낸 이상적 정체성은 언제나 실패를 가져다준다.

 

부부에게 큰돈을 가져다준 건 은행털이가 아니라 영화 시작부터 집 안에서 굽고 있던 쿠키였구요. 회사 선셋의 성공은 다른 경쟁자들과는 차별화된 지독할 정도의 솔직함이었죠. 더 맛있는 쿠키 대신 상류층 문화에 한눈 판 순간 거짓말처럼 회사는 몰락하게 되구요. 돈을 뜯어내기 위해 가짜 정체성을 연기하던 데이비드 역시 결국엔 몰락합니다. 메이가 스스로의 눈으로 본 것들을 솔직히 이야기한 행동은 사업의 기회로 이어지지만, tv에서 본 관절염과 파킨슨병은 끝내 레이의 실패로 귀결되죠.

 

영화 초반 은행털이를 위한 터널을 뚫는 장면에서 레이는 거꾸로 뒤집힌 지도를 들고 있는데요. 그 순간을 배역 레이가 아닌, 감독 우디 앨런이 거꾸로 뒤집힌 시나리오를 들고 작품을 디렉팅 하는 모습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작품의 역설적 진행을 짧은 코미디로 녹여낸 흥미로운 은유라 할 수 있겠죠.

 

 

 

 

 

 

# 5. 

 

결말에서 레이는 메이와 함께 치치의 값비싼 목걸이를 훔치게 되는데요. 치치의 진짜 목걸이는 금고에 넣어두고 차이나타운에서 만든 가짜 목걸이를 가져 나오게 됩니다. 의미심장한 마무리죠.

 

진짜 목걸이는 사실 가짜 목걸이입니다. 값비싼 진짜 목걸이는 원래 레이가 가질 수 없었던 이상의 목걸이, 즉 가짜 목걸이죠. 반면 가짜 목걸이는 진짜 목걸이입니다. 헐값의 싸구려 유리 목걸이이지만 레이가 스스로의 돈으로 주고 산 자신의 것, 진짜 목걸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씬은 레이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들고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이상을 다른 곳도 아닌 금고에 밀어 넣은 건 단순한 슬랩스틱뿐 아니라 망상에 가까운 이상적 정체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에 단호함을 더하는 은유라 할 수 있습니다. 프렌치와 다시 만난 레이가 아내에게 자신이 천재가 아닌 바보였음을 시인하는 장면은 같은 맥락에 대한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라 할 수 있겠죠.

 

레이의 목걸이를 프렌치가 한 알 한 알 돌로 깨버리는 씬은, 남의 흉내를 내고 싶은 레이의 집착이 완전히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갈갈이 갈려나간 싸구려 목걸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대신 더 이상 누군가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레이의 목걸이인 것이죠. 원래부터 레이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한 기술인 금고터는 기술을 이용해 아내가 담뱃갑을 다시 훔쳐오게 되고. 두 사람은 비로소 [타인의 뉴욕]이 아닌 [우리들의 마이애미]로 떠날 것을 약속하는 모습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아주, 아주 관념적인 결말이랄까요.

 

 

 

 

 

 

# 6.

 

감독은 영화 내내 레이와 프렌치를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의 이상을 최대한 긍정합니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고요. 사회적 문제도 해결해 주고요. 교양의 문제도 해결해 주죠. 모든 인물들은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노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모든 것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정체성만큼은 끝내 손에 쥐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까지 잃어버린 채 제자리에 돌아오고 말죠.

 

감독은 내 것이 아닌 정체성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기적 같은 일이 연이어 벌어지는 영화에서도 안 될 일이라면 현실에서는 더욱 터무니없다. 즉, "꿈깨라"가 영화의 메시지인 것이죠.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도 그랬구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그랬습니다. 낭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면을 긍정하지만 언제나 결말은 그럼에도 낭만을 손에 쥘 수 없다는 걸 확인하게 하는 빈 선물상자로 회귀합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재수 없는 영감탱이라구요.

 

 

 

 

 

 

# 7.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주인공 레이의 여정이라는 것은 <스몰 타임 크룩스>를 만들던 당시의 우디 앨런에 점점 더 다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인즉 영화 마지막 프렌치의 처절한 몰락은, 당시의 우디 앨런은 우디 앨런이 원하는 우디 앨런이 아님을 직시하게 한다 할 수도 있겠죠. 오슨 웰스도 말한 자기 치료적인 성격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이 같은 기준에서 본다면 조금은 연민이 들기도 합니다. 똑같은 메시지를 무수히 반복 생산하고 있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가 역설적으로 그가 수십 년 동안 낭만으로 집약된 이상적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증명한다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우디 앨런 감독, <스몰 타임 크룩스>였습니다.

 

:)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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