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Documentary/Humanism

좋아서 싫을 수도 있구나 _ 북극의 나누크,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

그냥_ 2021. 3. 16. 06:30
728x90

 

 

# 0.

 

분명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보헤미안 랩소디>, <베이비 드라이버> 같이 음악을 위해 이야기를 과감하게 투자하는 작품들도 있고 아예 <맘마미아>, <라라 랜드> 같은 뮤지컬 영화들도 있죠. <맨 프롬 어스>와 같은 작품들은 이야기보다 인물의 구도와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하구요. <퍼스트 맨>처럼 지독할 정도로 정서를 따라가는 작품도 있고 <러빙 빈센트>나 <셜리에 관한 모든 것> 같은 영화들은 회화적 스타일로 승부를 보는 이색적인 작품들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영화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를 하나 꼽아야 한다면, 어땠든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죠.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

『북극의 나누크 :: Nanook Of The North』입니다. 

 

 

 

 

 

# 1.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의 전부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를 하나 꼽아야 한다면 저는 다른 무엇보다 촬영 기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고유의 이야기를 만들기 어려운 장르 특성상 메시지를 전담하게 될 대상을 담아내는 기술의 지배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1000m 너머에서 피사체를 담은 화면으로 10m 거리에서 담아낸 화면의 밀착감을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360p 이하의 해상도로 8k를 넘나드는 해상도의 몰입감을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메시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일반의 영화에서는 의도적인 흑백 필터가 경쟁력을 가지기도 합니다만 다큐멘터리에서 '흑백의 사자'를 '컬러풀한 사자'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드론에 광각 렌즈를 달아 드넓은 대자연의 초원을 자유롭게 담아낸다거나, 비현실적인 수압을 극복하게 하는 장비를 통해 미지의 영역이었던 심해를 촬영한다거나, 수십만 수백만 광년 규모의 우주적 경관을 한눈에 마주할 때의 감동 등은 모두 발전된 촬영 기술에 근거하죠.

 

잘 만들어진 좋은 이야기 덕에 영화는 때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시대상의 변화를 극복하는 멋진 이야기를 품은 작품들을 우리는 클래식이라 부르죠. 저 역시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이창>, <39계단>, <애수>,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같은 고전의 명작들을 찾아보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조금 다를겁니다. 당시엔 최선을 다했을 과거의 촬영 기술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요. 아이폰 1세대가 제 아무리 기념비적 역작이라 하더라도 실사용의 측면에서라면 A14 바이오닉의 깡 성능 앞에 초라할 뿐입니다.

 

 

 

 

 

 

# 2.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촬영 기술이 핵심이고, 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촬영 기술의 한계를 옛날 다큐는 극복할 수 없다." 라는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명제가 거짓일 수도 있지 않을까? 촬영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 과거 다큐멘터리의 존재 가치를 멋지게 증명하는 작품들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난 지금껏 오래된 다큐멘터리를 한 편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런 결론을 편리하게 내리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당장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한편 골랐습니다. 선입견이 호쾌하게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큐를 보기도 전부터 가슴이 뛸 정도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더랬죠.

 

# 3.

 

북극의 나누크입니다.

 

측량 기사 출신의 '플래허티' 감독이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다 에스키모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 감독은 '나누크'라는 이름의 애스키모 가족의 삶을 통해 극단적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질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지적 탐구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을 편안한 유머와 어드벤처, 그 뒤에 깔린 인류 보편의 정서적 가치 등을 높은 현장감으로 묘사합니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1920년대의 시대성을 감안한다면) '미개한 원시인'들의 풍습을 비웃는 20세기 초 영미권 백인들의 하찮은 우월감을 충족한다는 니즈도 일부 포함되어 있긴 하겠지만요.

 

 

 

 

 

 

# 4.

 

앞서 지루하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작품 또한 기술과 패러다임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현장의 소리를 유의미하게 담아낼 수 없었기에 음향은 음악을 깔아 두는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화질은 디테일을 구분하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상당히 열악합니다. 화각이나 구도는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대적 기준에선 제한적이며, 무엇보다 세상 답답한 흑백이죠. 타 문화에 대한 다원주의에 근거한 객관화된 고찰보다는 감독 개인의 편의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의 개입이 너무 짙기도 하구요. 현장을 고스란히 관찰한다는 감각보다는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에스키모인의 삶'을 당사자를 통해 시현하는 걸 담아내는 식의 구성에 집착하고 있음이 연출에서 묻어나기도 합니다.

 

그럼 이 단점이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로 문제가 되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 5.

 

작품은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탐험기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도입에서부터 어느 모험가의 낡은 탐험 일지를 주워 읽는 것만 같은 글로 된 기록이 보편의 익숙한 내레이션보다 훨씬 독특한 매력의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탐험가라는 특수한 포지션과 쳅터를 나눠 놓은 고전적 구성이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듯한 학술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는 점도 썩 흥미롭구요.

 

사견에 불과합니다만 얼추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리얼리티를 최대한 강조한, 무형의 관찰자로서만 자리매김하던 소위 모던한 다큐멘터리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최근 들어선 경제논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출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로서 개입하는 작품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지 않나 싶은 인상이었거든요. 그동안은 장르 경계가 허물어지는 독특한 시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되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스토리텔링 중심의 다큐멘터리가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일종의 복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6.

 

현대 다큐멘터리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지우고 그 공간에 무형의 시선만 부유하게 만들어 높은 '현실감'을 추구해 왔다면, 이 영화는 상황에 엄연히 존재하며 인과를 주고받는 관찰자로서의 카메라를 명확히 하는 대신 그 옆에 관객을 앉힘으로써 최대한의 '현장감'을 추구합니다. 관찰자 입장에서 상황을 체험한 바에 입각해 재구성하고 이를 영상 시퀀스로 연결하는 방식이 대단히 이례적이면서 동시에 효과적입니다. '동화적 신비로움'과 100년의 시간과 지구반대편의 공간을 단숨에 넘는 듯한 '밀착감'과 오랫동안 숨겨뒀던 무언가의 먼지를 툭툭 털어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날 것의 매력'을 더합니다. 실체를 이해할 수 없는 아련한 '노스탤지어'는 덤이죠.

 

분명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의 기준에서 다시 보기에도 제법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앞으로 오래된 흑백의 다큐멘터리도 눈여겨 봐야겠구나. 라는 훈훈한 교훈을 남겨주기에 충분한 완성도의 고마운 작품이죠.

 

 

 

 

 

 

# 7.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영화에 얽힌 논란이 있다는 걸 실컷 다 보고 훈훈한 감상까지 끝낸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거죠;; 그거슨 바로

 

"조작 왜곡 논란."

 

주인공의 이름은 사실 가명(!). 본명은 '알라카기알락'이었고, 아내 '릴라' 역시 실제 아내가 아니라 감독 플래허티 감독의 애인(!)이었으며,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엔 이미 에스키모들도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아 총(!)으로 사냥하고 있었지만, 감독의 요청에 의해 작살로 사냥하는 똥꼬쇼를 한 것이라는 게 개봉 이후 밝혀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에스키모들은 이글루는 커녕 번듯한 집(!)에서 잘 살고 있었다고, 심지어 굶어 죽었다 말한 주인공 '알라카기알락'은 굶주림과 무관한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하죠. 이 모든 조작 왜곡의 이유는 당연하게도 미학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영화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함일 테구요. 세상에나.

 

"겁나 옛날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도 재미있을까?"라는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감상이 지독한 음모와 배신의 현장으로 변모합니다. 즐겁게 본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라는 찝찝함이 용솟음칩니다. 영화에 보고 난 후의 감동과 즐거움과 부정할 수 없는 에스키모에 대한 드라마적 감상이 상당 부분 머릿속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고오급 기만을 당했다는 불쾌감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가운데 그 끄트머리에서 고전 다큐의 맛을 알게 해 준 고마움이 역설적인 씁쓸한 뒷맛으로 남습니다.

 

 

 

 

 

 

# 8.

 

다큐멘터리의 시초이자 전설이 아니라 그냥 다큐의 형식적 기틀을 제시하고 활용했을 뿐 작가가 만들어낸 임의의 창작 영화로 봤다면 감상이 조금은 달랐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불쾌한 진실'을 모르신 채 다큐멘터리만 보고 지나갔더라면 나았을까요. 하지만 그런 비겁한 생각을 가지는 순간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아니 그보다 깊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과 극으로서의 재구성 사이에서의 균형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말겠죠.

 

... 어지간하면 평소처럼 짜증내며 이런 거 보지 마시라 하겠습니다만 안보고 지나가기엔 솔직히 너무 깔끔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모순된 말인 줄은 압니다만. 너무 좋아서 싫은 작품이군요.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 <북극의 나누크>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