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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난해한 것의 이유 _ 피부, 에두아르도 카사노바 감독

그냥_ 2020. 11.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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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장애우 라는 말을 아시나요?

 

학문의 전당에서 취업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 중인 대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건전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수신료만 받아쳐 먹... 아니, 땀 흘려 일하는 기자님들까지 거침없이 레퍼런스로 인용하곤 하는 민족의 지혜 주머니 킹무위키는 장애우라는 표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딴엔 중립적인 단어를 만들어 보겠다고 억지로 밀어붙였지만 끝은 참담했던 사어死語 ... (중략) ... 장애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장애우란 말은 "너는 불쌍하게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니 너무나도 착한 내가 불쌍한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와 같은 뉘앙스를 지니기에, 실제 장애인 중에는 병신이라는 말보다 장애우라는 말이 더 듣기 싫다는 사람이 많다.

 

 

 

 

 

 

 

 

'에두아르도 카사노바' 감독,

『피부 :: Pieles』입니다.

 

 

 

 

 

# 1.

 

장애우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을 누군가들의 진심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못마땅한 말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속마음을 의심하고 들었다간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요. 지금이야 많이들 조심하지만 여전히 장애우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몇몇 사람들 역시 특별한 악의가 있어 그런다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저 놀라울 만큼 무지했을 뿐이죠.

 

일련의 사달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선량한 질문에 성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대화와 논의의 과정을 선행했어야 했죠. 당사자들의 치열한 현실이 결부된 문제이니만큼 위 질문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를 우선 도출한 후 그 논리적 합의를 이정표 삼아 조심스럽게 구체화해 나갔어야 했습니다.

 

영화 <피부>는 장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고찰하는 데 있어 좋은 화두가 되어줄 수 있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작품에는 의식적으로 분류 가능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들과 다양한 이유들과 다양한 고민들과 다양한 관계들과 다양한 결말이 수집되어 있는데요. 어떤 캐릭터는 장애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상황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관점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어떤 관계들은 사회에 대한 장애인의 관점을 고민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결말은 상생이라는 방법론이 수호해야 할 근원적 가치의 기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도 하죠.

 

 

 

 

 

 

# 2.

 

본론에 앞서 작품의 서사가 연약하게 바스러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수의 주인공들을 무수히 오가는 혼란스러운 플롯과, 이해할 수 없고 때론 불쾌하기까지 한 과격한 표현과, 노골적이지만 동시에 의미가 쉬이 집히지도 않는 메타포들과, 입안의 모래알 같이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구조와, 정리되지 않은 채 뚝 끊어져 나간 것만 같은 결말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체적으로 영화에서 난해함은 단점입니다. 명작으로 평가받는 작가주의적 작품들마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보상이 확실할 뿐 난해함이 그 자체로 장점이 되지는 않죠.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릅니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난해함은 단점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관객이 영화로부터 느끼는 위화감과 난해함은 작품의 실패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자 메시지이며 의도와 철학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죠. 앞 단락에서 말씀드린 문제들 역시 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과 고민들을 강박적으로 소집해 최대한 소개하는 과정에서 치른 의도된 비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3.

 

가령 인어가 되고 싶어 했던 아들과 아빠의 팔에 새겨진 문신 사이에서의 정서적 인과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인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가상의 눈과 그에 대한 집착, 그녀와 그녀를 구매한 다른 여자 사이에 주고받는 만지는 행위에 담긴 함의와 역할 관계 변화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마지막 키스신에서의 혀를 보며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불편함이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불편함이라는 즉발적 감정과 논리적 윤리 진단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외형적 기형의 여부, 혹은 강박적 집착의 여부, 혹은 관계중심적이냐 - 자기중심적이냐의 여부에 따라 변하는 인물 분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 변화 속에 수차례 재조직되는 장애인의 정의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장애인의 정의를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 장면마다 문뜩 느껴지는 관객 개개인의 관성적 사고의 충돌로 인한 위화감과, 죄책감과 배덕감이 중첩된 호기심의 실체는 무엇일까.

 

라는 식의 난해함으로 인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넘어서는 동안. 장애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지평이 확장되는 감각을 느끼는 작품인 것이죠.

 

 

 

 

 

 

# 4.

 

감독은 철학적 메시지를 다루고 싶어 합니다. '장애인을 도와야겠다!'라는 식의 사회적 메시지나, '불쌍하다'는 식의 드라마적 메시지나, '불쾌하다'는 식의 배타적 메시지로 흘러가선 곤란하겠죠. 이를 위해 심미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동원해 사회적 메시지로의 일탈을 통제하고, 장면마다 분위기를 환기할 블랙코미디를 배치해 드라마적 메시지를 환기하며, 불편할 수 있는 상태에 대한 만화적 표현을 통해 배타적 메시지를 차단합니다. 과격함과는 대조적인 영리한 구성이군요.

 

# 5.

 

물론 그럼에도, 제 나름대로의 작품에 대한 변호와 메시지의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컬트적인 색채가 강한 과격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시작부터 웬 분홍 소시지 같은 할머니가 홀딱 벗고 나타나 피아노를 치면 이게 뭔가 싶은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똥꼬가 입에 달린 여인이 엉덩이에 달린 입에 깔때기 호스를 꽂아 넣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자리를 박차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충분히 이해 가능한 반응이죠. 막 나갈 것이라 선언하는 듯한 포스터에서 느껴지듯 피곤한 영화라는 점은 감안하셔야겠습니다만, 이런 영화를 만들어 상영할 수 있을 만큼의 자유와 에너지만큼은 참 부럽다는 생각입니다. '에두아르도 카사노바' 감독, 『피부』였습니다.

 

# +9. 영화를 가득 메운 분홍빛깔의 오브제들이 마치 현대 사회의 피부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장애를 배타하고, 학대하고, 추행하는 시스템의 장애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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