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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ction

글만은 못하다 _ 하트 오브 더 씨, 론 하워드 감독

그냥_ 2020. 8.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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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저 같은 문외한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긴 합니다만 부끄럽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비교 대상과 관련된 불필요한 정보나 명작의 권위에 관한 선입견, 원작 팬으로서의 쓸데없는 자긍심 따위 없이 담백하게 작품을 볼 수 있었죠. 영화를 보고 난 후 서재를 둘러보니 언제 산지 기억도 나지 않는 모비딕이 묵은 먼지에 덮혀 있네요. 이번 주말엔 고전 소설이나 한편 읽어봐야겠군요.

 

 

 

 

 

 

 

 

'론 하워드' 감독,

『하트 오브 더 씨 :: In the Heart of the Sea』입니다.

 

 

 

 

 

# 1.

 

그렇다고 소설을 고스란히 영화화한 작품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모티브가 되었던 '모카 딕 Mocha Dick'이라 이름 붙여진 난폭한 향유고래가 포경선 에식스 호를 침몰시킨 실화를 다룬 '너새니얼 필브릭'의 동명 소설 『In the Heart of the Sea : The Tragedy of the Whaleship Essex』를 재구성한 작품이죠. 영화는 사건이 일어나고 수십 년 후 미국의 작가 '허먼 멜빌'이 에식스 호의 생존자 '토마스 니커슨'과 나눈 취재 인터뷰를 재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2.

 

바다는 인간에게 오래도록 공포의 대상이었죠. 깊고 드넓은 바다는 온혈 육상동물인 인간의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들이 제약된 상황에서의 생존 공포를 유발합니다. 상어와 같은 포식동물들은 자유롭게 운동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피식 공포를, 고래나 크라켄과 같은 거대 괴수들은 자체 하중으로 인해 육상에선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적 스케일의 존재에 대한 경외적 공포를 유발하죠. 이 작품은 말씀드린 거대 생명체에 대한 경외적 공포와, 극한 환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두 개의 단단한 장르적 기둥 위에, 다각적 주제의식이란 지붕을 얹어낸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밧줄들이 인상적인 '범선'의 심미성과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마초의 로망. 활동반경과 가용 에너지가 극단적으로 확장된 격변의 시대, 야망을 가진 베테랑 일등 항해사와 새내기 금수저 선장의 드라마 따위가 고래와 바다에서 벌이는 처절한 사투 사이사이의 볼륨을 적절하게 메워냅니다.

 

 

 

 

 

 

# 3.

 

여타 리뷰들에 비해 유달리 단정적으로 정리하는 건 시나리오가 그만큼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대단히 클래식한 서사와 연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각자 나름의 불만과 부담과 목적의식을 안고 출항을 준비하는 지점까지의 [기]
  2. 항해를 나선 후 '모카 딕'을 만나 에식스 호를 잃는 지점까지 어드벤처로서의 [승]
  3. 배를 잃고 표류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구출되기까지 육중한 생존 드라마로서의 [전]
  4. 구출된 이후의 청문회와 '허먼 멜빌'의 퇴장까지의 [결]

라는 식의 노골적으로 분절된 고전적 구성이죠.

 

인터뷰를 진행하는 1850년의 세 인물 정도를 제외하면 주연 '오웬 체이스'를 비롯한 과거의 모든 인물들은 한 줄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평면적인 캐릭터들입니다. 풍부한 경험에 생존력과 리더십을 두루 갖춘 먼치킨 주인공 '오웬 체이스'. 아는 것과 가진 것은 많지만 경험은 일천한 자존심 강하고 불안한 라이벌 '조지 폴라드'. 주인공을 오래도록 서포트 해온 파트너 '매튜 조이'와, 라이벌의 지저분한 정서를 일부 대신 받아줄 사촌 '코핀'. 이들의 모험을 두루 관찰하고 기록하는 초심자 '토마스 니커슨' 옆에서 머릿수를 채워줄 조연들이라는 좋게 말하면 클래식한 나쁘게 말하면 상투적인 파티가 꾸려집니다. 고래와 바다라는 공통의 적대적 대상에 대한 시련을 겪은 후 갈등하고 화해하고 이탈하고 성장하고 책임진다는 안정적인 전개 위에서 캐릭터들은 각자 짊어진 행동을 무난하게 수행합니다.

 

 

 

 

 

 

# 4.

 

작살을 던지는 순간 다치는 손, 비가 되어 내리는 고래의 피, 고래 기름에 의해 불타 가라앉는 포경선과, 나무 조각이 눈가에 박힌 '모카 딕'을 바라보는 '체이스'의 표정 등은 인간의 폭력적 욕망과 카르마에 대한 친절한 은유와 복선들입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비극에 걸맞은 푸른 계열의 창백한 색감과, 항해의 다이내믹함을 최대한 북돋우는 과감한 앵글 배치 역시 관객 친화적이죠. 적재적소의 인터뷰 인서트들은 작품에 섬세하고 풍부한 서술적 묘사를 곁들임과 동시에 특정 과격한 상황들에 대한 불필요한 과몰입을 적당히 걸러내는 장치로서 성공적으로 작동합니다.

 

인간의 무자비하면서 동시에 자해적인 욕망. 본질적 가치들의 충돌과 극단적인 상황하에서 폭압적으로 강요되는 선택. '인간성'이라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재고와,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겸허함 따위의. 사람에 따라 그 감상이 천차만별일 다양한 주제의식들이, 극적인 실화와 만나 관객을 깊은 사색으로 인도합니다.

 

심지어 마지막 석유 시추와 관련된 펜실베이니아 드립조차 (기본적으론 영화를 마무리하는 가벼운 조크입니다만) 일련의 생존 투쟁의 허망함과 함께, 고래기름과 석유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현대인들 역시 과도한 욕심으로 우리 시대의 '모카 딕'을 향한 무모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식의 환경주의적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죠.

 

 

 

 

 

 

# 5.

 

혹시 눈치채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제가 이야기한 호평은 사실 대부분 영화가 아닌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작품의 장점 대부분이 영화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장점들이라는 것이죠. 

 

글쎄요, 뭐랄까요. 전 소설가들에게 선물 같은 영화라 생각했습니다. 감독 '론 하워드'의 역량과는 무관하게 영화로 만드는 것보다 소설로 남기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었거든요. 현대 영화가 제 아무리 무궁무진한 자본력과 잠재력을 가진 종합예술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를 다루는 다른 모든 분야들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달까요.

 

소설이었다면, 첫 번째 [기] 파트에서 이 영화보단 훨씬 밀도 있는 섬세한 시대-인물 묘사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승] 파트도 강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겠죠. [전] 파트의 섬에 남겨진 '조이'나 식인과 관련된 대목들 또한 소설이었다면 모카 딕의 긴장감을 이어받아 더 극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을 테고, [결] 파트 역시 '체이스'와 '니커슨'과 '폴라드'의 정신적 묘사와, 이들을 받아들이는 1819년의 사회상과, 작가 '허먼 멜빌'의 철학적 사유의 표현 등에 더 많은 공을 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 6.

 

반면, 그에 비해 영화는 각 파트마다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의 시대 묘사는 인물 소개에 급급해 충분한 밀도를 확보하지 못한 이쁜 그림을 위한 이쁜 그림에 머무르고 맙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선에서 통제되었어야 할 두 번째 파트는 되려 영화의 가장 과격한 스펙터클을 짊어지며 이후의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고 말죠.

 

클라이맥스가 되었어야 할 세 번째 파트는 '니커슨'의 간접적 회상 몇 마디로 대체되는 바람에 충분한 긴장감과 주제의식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부족한 긴장감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카 딕'을 난파선에 90일 동안 질질 끌고 오는 무리수까지 뒀지만 역부족이었죠. 마지막 파트 역시 극단적인 상황을 해쳐 나온 세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 그저 어드밴처를 해쳐 나온 슈퍼히어로 같아 보이고 맙니다. 이 정도면 소설에 대한 영화의 완패라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죠.

 

서두에서 어울리지 않게 '소설이나 한편 읽어 봐야겠다'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후 차라리 소설로 읽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못봐줄 정도로 졸작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 고유의 잠재력과 범선 및 고래들의 심미적 구현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 스스로의 성취를 찾기 힘들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죠. '론 하워드' 감독, 『하트 오브 더 씨』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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