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두 번 봤습니다. 좋아서는 아니구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그랬죠.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서사를 풀어놓는데요. 오프닝은 이렇습니다. “저는 우주를 만듭니다. 이것은 당신의 어항. 당신의 우주입니다.” ... 뭔 소린가 싶죠. 대사가 죄다 이런 식입니다. 갬성 돋는 형용들을 늘어놓듯 쏟아내는 데 귀에 박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장은진' 감독,
『당신의 어항』 입니다.
# 1.
독창적인 표현을 하고 싶다면 서사는 친절해야 합니다.
독창적인 서사를 다루고 싶다면 표현은 친절해야 합니다.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나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같은 영화들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연출과 표현을 시도하는 대신, 서사는 친절하게 전개합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her』과 같은 영화들은 철학적이고 독특한 설정의 서사를 전개하는 대신 표현은 분위기 정도 조성하는 선에서 절제하고 있죠. 물론, 독창적인 표현과 독창적인 서사를 함께 쫓는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몇몇 거장들은 명작을 연성해 내기도 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설프게 둘 모두를 쫓다가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이사랑' 감독의 역작 『리얼』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군요.
# 2.
이 영화가 그러합니다. 독창적 표현과 독창적 서사를 함께 잡아보려 하다 결국 두 마리 모두를 놓치고 맙니다. 옥탑방이라 주장하는 반지하 단칸방과, 밑도 끝도 없는 어항과, 의미 없는 지구본과 선풍기와 통조림과, 자취방 화장실에서 피우는 담배 따위의. 채 중2병을 벗어던지지 못한 자취를 꿈꾸는 20대 소녀의 로망으로 공간 연출은 떡칠되어 있습니다. 왜 때문인지 모를 꿈 타령과, 공황장애를 몰고 올법한 눈뽕과, PPAP를 추게 만드는 파인애플과, 쉴 새 없이 귀를 괴롭히는 난해한 내레이션들로 영상 연출은 떡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연출의 난잡함은 서사의 난해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관객은 주인공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창밖 벽에 낙서를 하는 여자 또한 누군지 모르죠. 갑자기 호롤로로로롤 놀라더니 책상 밑에 놓인 어항을 꺼냅니다? 누구나 냉장고엔 먹다 남은 트러플 오일이 있는 것처럼 반지하 단칸방 책상 밑엔 어항 하나쯤은 있는 걸까요? 맞은편 가계 셔터에 낙서하는 뒷모습을 보더니 또 사랑에 빠졌대요. 왜? 뒤태에서 꿀이라도 떨어지는 건가? 꿀이 아니라 파인애플이 떨어지네? 뭐야 3개씩이나? 비쌀 텐데? 따라오라는 건가? 어디 갔어 또? 어항을 뒤집어써? 좋다고 웃는다고? 어? 끝? 잠시만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거 맞아?!?!
# 3.
이미지들과 서사의 밀착감이 놀라울 정도로 빈약합니다. 솔직히 파인애플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몇 번을 봐도 모르겠구요. 어항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왜 그림을 그리는 건지, 그림에 파인애플을 왜 그리는 건지, 파인애플은 그렇다 치고 연필은 또 왜 그리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왜 파인애플을 따라가는지도 모르겠구요. 길거리 한복판에서 어항을 뒤집어쓰는 게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 지도, 영화 제목 속 ‘당신’이 누굴 의미하는 건지도, 그 ‘어항’이 어떤 문학적 의미를 가지는 지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 유추하려 들면 유추할 수는 있을 겁니다만, 그렇게 보는, 보다 정확히는 '그렇게 봐야만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을 관객이 즐기는 매체지 관객이 스스로 상상해가며 즐겨야 하는 매체가 아니죠.
# 4.
도전적인 것 좋습니다. 실험적인 것 좋죠. 하지만 그전에 영화라면, 특히 '단편' 영화라면 한 가지 정도는 선명해야 합니다. 묘사에서든 서사에서든 주제에서든 뭐가 되었든 적어도 한 가지는 선명한 지점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진득하게 작품에 들어갔다가 천천히 여운을 느끼며 빠져나올 수 있는 장편들에 비해 단편은 시작과 동시에 전개를 시작해, 몇 분 지나지 않아 절정을 넘어 결말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죠. 감독이 창조한 자유로운 영화의 바다가 제아무리 말랑말랑 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배는 튼튼하고 건실해야 합니다. 바다가 흐느적거린다고 배까지 부실해 버리면 바다를 즐길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건 표류죠.
‘어떤 느낌'만이 부유하고 있을 뿐 영화와 소통하고 있다는 감각은 희미합니다. 아무런 감흥 없이 표류하다 정신 차려보니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목격하게 되는 기분입니다. 영화가 뿌옇다는 거죠. 마치 어항을 뒤집어쓴 것처럼요. '장은진' 감독, <당신의 어항> 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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