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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Historical

쉬운 정답, 어려운 풀이 _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매튜 쇼이쳇 감독

그냥_ 2019. 7.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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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1명이 마약을 하면 그 1명을 구속하면 됩니다. 10명이 100명이 1000명이 마약을 해도 체포하고 구속하면 되죠. 하지만 그 수가 10만 명, 100만 명, 1000만 명에 달해도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람이 그렇게까지나 불어나버린 상황에서 무작정 모두를 범죄자로 삼아 체포하려 들면 사회는 급격하게 음성화 되고 부작용을 낳게 될 겁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경우 보통 사회는 문제의 해악과는 별개로 해당 사안을 그냥 끌어안아버리려 합니다. 대마나 담배나 별 차이가 없음에도 대마는 불법으로 삼고 담배는 국가가 판매하는 이유죠.

 

사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정의롭지 않습니다. 같은 값이면 올바르려 노력하기는 하겠지만 그 올바름이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려 본능에 우선하지는 않죠. 간혹 올바름과 존속(혹은 안정)이라는 가치가 충돌할 때면 얼마나 손쉽게 정의로움을 내팽개칠 수 있는지 그 잔인함과 비열함을 목격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이 그러했죠.

 

 

 

 

 

 

 

 

'매튜 쇼이쳇' 감독,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 The Accountant of Auschwitz』입니다.

 

 

 

 

 

# 1.

 

누군가는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는 과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래의 선례를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런 이상적인 의미도 크긴 하겠지만 진짜 과거의 분노 때문은 아닌 걸까요?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왜 피해자들의 분노와 같은 과거의 문제면 안 되는 거죠? 왜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 앞에선 습관처럼 감정을 터부시 하는 걸까요?

 

또 다른 누군가는 스무 살에 저지른 잘못을 아흔이 넘어서 단죄하는 것이 진짜 좋은 답인 거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당장은 편리하겠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거냐 묻습니다. 히틀러들 앞에서 수백만 명이 함께 외친 '하일'은 뭐였냐 묻습니다. 독일이 그들을 재판할 자격이 있는가, 몇몇에게 이 모든 짐을 뒤집어 씌우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일갈합니다.

 

이론과 감정이 혼재한 상반된 주장이 충돌합니다. 각자 나름의 당위성과 논리를 펴는 동안 판단을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방인이죠. 우리에게는 나치의 부채감도 나치에 의한 피해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함께 영화를 보도록 합시다.

 

 

 

 

 

 

# 2.

 

아우슈비츠는 역사적 함의를 가진 공간이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회계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명 나치에 기여했음에도 직접적으로 폭력에 참여한 바는 없는 이 애매함이 논쟁의 불씨입니다. 아주 짙은 무한 책임을 가지는 '히틀러'에서부터 아주 옅은 도의적 책임만을 가지는 일반 시민 사이에 펼쳐진 책임의 그라데이션 속에서 회색지대에 놓인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와 같은 무수히 많은 애매모호한 질문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정리하던 회계원 '오스카어 그뢰닝'이라는 인물의 재판입니다. 작은 시골의 재판소엔 마을의 역사상 가장 큰 송사를 앞둔 법조인들과 수많은 기자, 시민들, 시민단체, 생존자들이 자리합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독일 법정에 앉아 독일 판사들과 변호사에 둘러싸여 정중하게 대접받는. 그야말로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나치스트들에 대한 재판은 그리 희소하지 않음에도 '그뢰닝'의 재판이 주목받았던 건, 그가 범죄 사실 일체에 대해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70년의 시간이 지나서까지 처벌될 만큼 크지는 않다 주장합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할 때에도 스스로의 잘못이 70년의 세월을 넘어 처벌받을 만큼 충분히 크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면피하기 위해서라도 축소하고 은폐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테니까요.

 

 

 

 

 

 

# 3.

 

실제로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큼 이 '그뢰닝'이란 인물은 애매하긴 합니다. 그는 저지른 범죄에 비해 과도한 관심과 담론을 짊어집니다. 영화 속 "상징이 되어버린 사람은 흔히 불공평하게 타깃이 된다."라는 말은 충분히 되새겨볼 만합니다. 그는 전쟁 직후의 독일이 충분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었더라면 아무런 관심을 못 받았을 법한 인물입니다. 매우 매우 낮은 직책의 존재였기에 관심은커녕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럼에도 그에게 마치 나치즘의 모든 부채가 떠 안겨져 있는 모양새가 불편하게 펼쳐집니다. 그 뒤로 독일 스스로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면피하려는 비굴함이 슬쩍 엿보이기도 하는군요.

 

2차 대전 이후의 독일은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비굴하고 비열했습니다.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나치스트들을 풀어내는 데 로비를 했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독일 정부였습니다. 전범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지시했던 판사들의 99%가 나치스트였습니다. 아우슈비츠 문제로 기소된 22명 중 16명이 5년 내에 석방됩니다. 실제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람들은 3년 이내 모조리 석방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재판. 우리에게도 익숙한 어디서 많이 본 일이네요. 한 변호사는 독일의 역사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대단히 역설적인 공간이라 말합니다. 나치의 참상을 대변하는 참회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나치의 모든 문제를 객체화시켜 끌어안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죠.

 

 

 

 

 

 

# 4.

 

당시 기준에서 광의의 나치 전범은 사실상 모든 독일 국민이었습니다. 전력전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전에서 전쟁이 범죄가 되어버리는 순간 당시에 동원된 모든 국민들이 사실상 전범이 되어버리니까요.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 중 절대다수가 60년 전, 70년 전에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눴다는 현실 속에서 독일이 원론적인 자성적 처벌을 스스로 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인 요구인가라는 회의론도 생기는군요. 재판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과 함께 충분히 늦었기에 비로소 재판을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겹쳐 니다.

 

시간이 충분히 흘러 책임이 세대라는 거름망으로 충분히 희석되고서야 재판을 하는 독일의 모양새가 비겁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측은해 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70년이 지나 아흔이 넘은 노인네들을 붙잡고서야 전범 재판을 재개하는 독일과, 광복 직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고 70년이 지난 후에서야 격정적인 반일 불매를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요.

 

 

 

 

 

 

# 5.

 

'그뢰닝'의 재판은, 재판의 목적이 죄의 크기에 대한 측정과 그 죄의 크기에 부합하는 만큼의 단죄가 되어버리는 순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질문을 새로 해야 하죠. 처음으로 돌아가는 합니다. 왜 그들을 재판에 세우려 하는가. 왜 그들을 재판에 세워야 하는가.

 

70여 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무의미한 것일까요? 80년 전의 일상을 살고, 70년 전의 평범을 살고, 60년 전의 관용을 살아낸 사람을 지금의 기준에서 처벌하는 것이 옳은 걸까요? 500살이 넘은 세종대왕이 지금 눈앞에 살아있다면 그를 독재 혐의로 기소하는 것이 정당한 걸까요? 300살의 이순신 장군이 눈 앞에 살아 돌아온다면 그를 차별주의자로 기소하는 것이 정당한 걸까요? '그뢰닝'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인본주의적인 논리는 통시적 가치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시대성을 아예 배재하도록 할 만큼 압도적인 것일까요? 일련의 논리들이 어쩌면 지난 시대의 비열함에 대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는 없을까요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처벌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 기여의 정도는 어떻게, 누가 결정하는 걸까요? 어쩌면 아우슈비츠의 회계사는, 총기난사범에게 총을 판매한 상인보단 덜 간접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우리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그뢰닝'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우슈비츠의 회계사는 죄가 없다거나 총기 난사범에게 총을 판매한 상인은 죄가 있다는 판단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위의 쏟아지는 질문 따위들을 넘어서야겠죠. 그냥 기분 나쁘니까 책임져라고 하는 것과 충분한 사유의 결과로 인해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 뚜렷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 6.

 

영화는 직관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골치 아픈 질문들을 효과적으로 모아 두고 있습니다. '존 데마뉴크'라는 아우슈비츠의 경비병을 디딤돌로 준비해 두긴 했지만 이 영화 본연의 가치는 쏟아지는 질문에 있습니다. 감독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적절히 조율하면서 친절하고 강단 있게 질문을 이어가는 데 성공합니다.

 

후반부 나치를 용서한다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바'의 존재는 영화의 화룡점정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용서해서는 안 되는 잘못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 건가. 라는 질문이 관객의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재판의 당위가 되는 피해자가 용서해버리는 순간 단죄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분칠 된 주장 뒤에 숨겨진 비겁함이 벗겨지는 기분이죠.

 

용서함으로 물리쳤다 말하는 '에바'와 아우슈비츠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그뢰닝'이 포옹하는 장면은 결국 이 모든 난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합니다. 재판의 목적은 결국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여야 한다는 것이죠.

 

 

 

 

 

 

# 7.

 

영화를 보고 난 후 번잡하게 떠오른 생각들을 손 가는 데로 마음 가는 대로 글로 써 내려간 후 한번 다시 읽어 보니 중구난방 개판이네요.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고. 사실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저 역시 이 캐나다 감독이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확고한 풀잇법을 얻지 못한 상태니까요. 아직 고민을 더 해봐야 될 어려운 문제지만 우리들, 특히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와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 언젠가는 다시금 곱씹어봐야 할 질문들이긴 합니다. 오늘 밤은 일찍 자긴 글렀군요. '매튜 쇼이쳇' 감독,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이였습니다.

 

in Memory of Bill Glied (1930' - 2018')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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