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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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71

완만한 하강곡선 _ 웰다잉, 오누리 감독

# 0. 야, 야. 있잖아. 어떤 남자가 자살을 하려는데 딱 죽기 직전 그때! 하필 똑같이 죽으러 온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거야.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오누리' 감독, 『웰다잉 :: Well dying』입니다. # 1. 생각해봐. 모든 걸 포기하고 유서까지 써 놓고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야. 죽음은 끝이잖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시작이고. 끝과 시작의 중첩. 뭔가 그림 나오지. 벼랑 끝에 선 사람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거침없는 위로. 미련도 뭣도 없는 순간에 선 사람들의 홀가분한 진심. 그런 진심들이 예기치 않게 쌓아나가는 연약하지만 생동감 있는 생生의 이유들과, 그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감동. 뭐 이런 류의 주제의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Film/Drama 2021.10.10

인생의 트램펄린 _ 럭키 몬스터, 봉준영 감독

# 0. 불행한 토끼는 사자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봉준영' 감독, 『럭키 몬스터 :: Lucky Monster』입니다. # 1. 가냘픈 토끼로 태어난 남자, 도맹수의 이야기입니다. 태생이 나약하고 겁 많고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입니다. 직업은 그의 성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피라미드 회사 녹즙기 판매원이죠. 고달픈 와중에 거액의 빚까지 지고 있는데요. 사채꾼 노만수의 독촉에 허덕이던 그는 결국 아내 성리아에게 위장이혼을 제안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인 아내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한편 언젠가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환청은 스스로를 도맹수만을 위한 라디오 DJ 럭키 몬스터라 소개합니다. 도맹수는 환청이 들릴 때면 용각산을 먹어 뿌리치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럭키 몬스터의 멘..

Film/Thriller 2021.10.05

쓰러지지 않는 도미노 _ 산나물 처녀, 김초희 감독

# 0. 아, 부끄러워라. '김초희' 감독, 『산나물 처녀 :: Ladies of the Forest』입니다. # 1. 도미노를 만들 겁니다. 주어진 땅은 좁지만 그래도 알차게 블록들을 모았습니다. 테마도, 밑그림도 그럴싸하게 준비했습니다. 세심한 손길로 줄지어 놓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블록이 서 있는 지금은 의미 없어 보이겠지만 쓰러트리고 나면 멋진 그림이 완성될 겁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블록들이 뉘어지는 순간 뭇사람들이 예상치 못할 의외성과 창의성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다시, 하나... 둘... 셋... 드디어 완성입니다. 처음 블록을 놓았던 자리로 돌아갑니다. 관객도 충분히 모였으니 이제 쓰러트리기만 하면 되는... 데? 어라? 왜 안 쓰러지지? 첫 블록이 쓰러질 듯 쓰러질..

Film/Drama 2021.09.05

닿아버렸네요 _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정가영 감독

# 0. 대사 맛있다. '정가영' 감독,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 Love Jo. Right Now.』입니다. # 1. 작품을 관통하는 한마디. 감독과 교감하며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모조리 관통하는 단 한마디의 대사가 목소리가 되어 귀를 파고드는 순간의 전율입니다. 오랜만이네요. 꿈속의 꿈이라는 키워드로 표현되는 이야기 구조라거나, 감독이 일관되게 보여온 형식들과 그 속에서의 소소한 변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인서트의 함의 등에 대해 썰을 풀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닿아버렸네요."라는 한 문장으로 끝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닿았네요 아니고, 닿고 싶었어요도 아니고, 닿았으면 좋겠어요도 아니고, 닿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도 아니고, 닿으면 어떡하죠도 아닌. 닿아 버렸네요..

Film/Drama 2021.08.20

무시하는 겁쟁이 _ 오목소녀, 백승화 감독

# 0. 촉망받던 유망주였지만 바둑 대회에서 실패를 겪은 후 기원 알바를 전전하던 주인공이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오목 대회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전반적으로 짧은 호흡의 가벼운 말장난 개그로 승부 보는 코미디물인데요. 57분 내내 한방의 훅 없이 잔펀치만 집요하게 때리다가 마지막에 따뜻한 메시지로 반창고를 붙여주는 영화라 말씀드린다면 무난하겠네요. '백승화' 감독, 『오목소녀 :: Omok Girl』입니다. # 1. 2014년 이후 만들어진 바둑과 인생을 엮는 다른 모든 창작물들처럼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작품입니다만 감독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패러디물로 가볼까?' 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합니다. 알파고 드립과 같은 잔잔한 농담뿐 아니라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나 드립 등은 특히 노골..

Film/Comedy 2021.08.18

내일도 날씨는 맑음 _ 병훈의 하루, 이희준 감독

# 0. 오염 강박과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병훈은 남들에겐 별일 아닌 숙제를 전쟁처럼 치러낸다. 하루의 끝에는 그를 위한 진짜 선물이 있었다. 병훈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선물을 재발견하고 이 순간에 감사를 느낀다. '이희준' 감독, 『병훈의 하루 :: Mad Rush』입니다. # 1. 이희준 감독 작품입니다. 이희준이란 이름은 배우밖에 모르신다구요? 네, 그 사람 맞습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병훈'의 하루입니다. 시나리오 특성상 메시지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묘사의 완성도는 다시 배우의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한 배우가 바로! 이희준이죠. 감독도 하고 주연도 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

Film/Drama 2021.08.04

극본과 연출 사이 _ 킹덤 아신전, 김성훈 감독

# 0. Netflix 오리지널 드라마 의 첫 번째 외전입니다. 두 개의 정규 시즌을 끝낸 후 신규 캐릭터에 대한 외전이 전개될 계획이었던 듯합니다만 팬더믹으로 인해 외전 시리즈가 몇 편 더 이어지는 요량인가 본데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습니다만 시리즈를 애정 하는 입장에서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군요. '김은희' 작가, '김성훈' 감독, 『킹덤 _ 아신전 :: Kingdom _ Asin of the North』입니다. # 1. 특정 캐릭터에 집중하는 '인물전'은 보통 두 가지의 접근법을 가집니다. 하나는 본편에서 충분히 활약한 인물의 남겨진 떡밥을 회수하는 경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할 인물이 곧바로 본편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과거 설정들을 미리 전달하는 경우죠. 전자는 시리즈나 시리즈 ..

Film/Horror 2021.07.31

따뜻한 이미지, 희미한 메시지 _ 종천지모, 최한규 감독

# 0. 종천지모 [終天之慕] 이 세상(世上) 끝날 때까지 계속(繼續)되는 사모(思慕)의 정 '최한규' 감독, 『종천지모 :: 終天之慕』 입니다. # 1. 낡은 괘종시계가 오래된 무언가를 은유합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늦은 저녁 9시는 누군가의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계의 옆면에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조각도로 파 놓았다는 점은 불변성과 정성 등을 상징합니다. 글귀 는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의식입니다. 천천히 죽을 쑤는 할아버지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을 녹여 더한 공덕입니다. 건더기를 넣지 않은 듯한 맑은 죽은 할아버지의 정성에 순수성의 이미지를 더합니다. 쌓인 약병은 식사하실 분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낡은 칫솔 두 개가 가지런히 ..

Film/Drama 2021.07.11

맛없는 도시락의 역설 _ 4교시 체육시간, 예민희 감독

# 0. 이어폰을 낀 기환의 걸음걸이, 시선, 자세에서 느낌이 팍 옵니다. 크흑... 이것이 '진짜'라는 것인가. 중 세 번째 단편입니다. '예민희' 감독, 『4교시 체육시간 :: School Off』입니다. # 1. 전직 엘리트 찐따의 전문가적 식견으로 보건대 캐릭터 디테일이 썩 훌륭합니다. 특유의 어수룩한 말투, 뭘 해도 애매한 엉거주춤한 자세, 꾀병 부려 체육시간 제끼고 교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의기양양함 뿐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의해 왜곡된 겉모습과 내적 자아의 간극, 평소 들어온 말들과 해왔던 행동들이 자신도 모르게 투사되는 순간들에 대한 표현이 풍부하면서 또 자연스럽습니다. 아이템의 중량감을 통제하기 위해 인물의 희화화가 아니라 장르적 음악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세심하다 해야 할 듯하구요. ..

Film/Comedy 2021.07.09

번뇌와 번민에 빠진 건 누구? _ 제8일의 밤, 김태형 감독

# 0. 애매하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기보단 각 잡고 하나를 제대로 하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나 데뷔작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영화는 크게 불교, 오컬트, 범죄 스릴러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작동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은 각각의 코드가 서로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인 듯 보입니다. '김태형' 감독, 『제8일의 밤 :: The 8th Night』입니다. # 1. 시작과 동시에 부처님은 눈깔 뽑기 장인이 됩니다. 흔히 불교 하면 떠올릴법한 자비나 참선 등의 이미지와 배치된 다소 폭력적인 설정이지만, 뭐 그럴 수 있죠. 감독은 이 부분의 문제를 후반부 관념화를 통해 극복합니다. 빨간 눈깔은 번뇌하는 눈, 검은 눈깔은 번민하는 눈이라는 건데요. 확실히 이 토대에서라면..

Film/Horror 2021.07.07

너무 에드가 라이트 _ 개강, 왕천일 감독

# 0. 오랜만에 옴니버스입니다. 동국대 영상대학원 제작이라는 걸로 봐서는 학생 작품인 듯하네요. 옴니버스의 제목은 영화 속 누군가의 흑역사로도, 훗날 위대한 감독이 될 유망주들이 되돌아보며 흑역사라 말할 초기작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거겠죠. 좋습니다.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왕천일' 감독, 『개강』입니다. # 1.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사담을 잠시 해볼까요.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만들든 영화를 만들든. 분야를 막론하고 창작과 관련된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타게 되는 '일정한 테크트리'가 있습니다. 입문할 때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그럴싸한 작품을 얼마든지 만들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는 것과 만드는 것 사이에는 어마무시한 간극이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됩니다. ..

Film/Comedy 2021.07.05

사장님, 스릴러 1인분 추가요 _ 침입자, 손원평 감독

# 0. 주인공은 보통 두 명입니다. 멜로라면 20대를 캐스팅하겠지만 중량감도 조금 필요한 스릴러에선 30~40대 배우를 섭외하는 게 정석이죠. 한 명은 영화 내내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잡으러 다닐 테구요. 나머지 한 명은 영화 내내 도망 다닐 겁니다. 둘 중 한 명은 놀래키는 역할, 다른 한 명은 놀라는 역할일 텐데요. 도망가는 쪽이 놀랄 수도 있고 쫓기는 쪽이 놀랄 수도 있습니다. 요 정도는 감독의 재량이죠. '손원평' 감독, 『침입자 :: intruder』입니다. # 1. 도망가는 애는 싸움을 겁나 잘하든 돈이 겁나 많든 머리가 겁나 좋든 쪽수가 겁나 많든 아니면 아싸리 만능약이 있든. 뭐가 되었든 특별한 능력이 있어 저게 말이 돼? 싶은 난관들을 아주 손쉽게 돌파합니다. 쫓아가는 ..

Film/Thriller 2021.06.25

직업병 _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 0. 문소리 감독은 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의 치열한 현실과 페이소스를 묘사합니다. 김윤석 감독은 을 통해 배우의 시선에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진영 감독 역시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 을 통해 배우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정체성 갈등을 전개합니다. 배우, 특히 배테랑 배우가 영화를 만들면 첫 작품에서 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진영' 감독, 『사라진 시간 :: Me and Me』입니다. # 1. 영화 초반 이영은 세 인격에 빙의됩니다. 돌아가신 수혁의 어머니와 코미디언 이주일, 레슬러 역도산이죠. 얼핏 세 인물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백종렬 감독의 처럼 저녁이면 랜덤 하게 찾아오는 각기 다른 인격의 예시인..

Film/Drama 2021.06.23

위령제 _ 후쿠오카, 장률 감독

# 0.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장률' 감독, 『후쿠오카 :: Fukuoka』입니다. # 1. '제문'의 헌책방입니다. 켜켜이 쌓인 헌책은 오랜 시간에 걸친 누적의 산물입니다. 책방은 축적된 기억의 공간이자 관념의 공간입니다. 환청이 들립니다. 이름 모를 남자의 목소리입니다. 모든 정보는 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지만 남자의 목소리만큼은 순간 휘발되어 사라지는 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문이 전화를 걸어 해효의 소식을 묻는 동안 소담은 책방 깊숙한 곳에 숨겨진 하얀색 을 꺼내 듭니다. 등의 형상은 책방에 있는 것이라기엔 이질적입니다. 밝고 선명하며 장식 없이 둥근 모양입니다. 완전하고 원형적이며 순수합니다. 소담은 묻습니다. "아저씨, 이런 거 좋아해요?" 제문과 소담이 20년 넘게 연락하지 않..

Film/Drama 2021.06.21

1초 _ 내가 어때섷ㅎㅎ, 정가영 감독

# 0. 대화하는 두 사람 뒤로 흐르는 시계 소리 똑. 딱. 똑. 딱. '정가영' 감독, 『내가 어때섷ㅎㅎ :: What's Wrong with Me? KK』입니다. # 1. 일부러 조금 더 반가운 척 말하는 목소리 1초. 수찬의 적당한 핑계에 무안해져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1초.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유진과 얼마나 만났는 지를 떠보는 1초. 일부러 심드렁한 척 한창 좋을 때네 말하는 1초. 5년, 8년, 10년. 27 평생 도합 23년을 연애했노라 말하는 뻔뻔한 1초. 이 남자가 내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는 것에 내심 자존심 상하지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 1초. 그럼에도 "저 연애 잘해요!" 라 발끈 해 말하는 1초. 개구진 표정으로 "저랑 연애하실래요?" 라 말한 후 잠깐 가만히 멈춰 선 가영의 1..

Film/Drama 2021.06.19

김종관의 영화세계 _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 0. 감독 김종관의 영화입니다. 김종관 감독, 『최악의 하루 :: Worst Woman』입니다. # 1. 골목길입니다. 물리적인 '방향성'과 다양한 골목들의 '보편성'과 좁은 곳을 파고드는 '탐구성'의 이미지입니다. 폭이 있는 도로를 구태여 한 곳으로 몰아 잘라버릴 정도로 감독은 좁고 깊은 길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한 일본인이 골목길을 걷습니다. 길가에 앉은 할머니가 엄한 외국인을 보며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이 인물에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다른 함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길을 걷다 말고 공사장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장면 역시 이 인물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속을 들여다보게 될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한예리입니다. 레슨을 진행하는 교수가 연기하는 동안 그녀는 거울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거울은 ..

Film/Romance 2021.06.15

버퍼링 주의_ 우로보로스, 계영호 감독

# 0. 제목이 강스포군요. '계영호' 감독, 『우로보로스 :: Ouroboros』입니다. # 1. '우로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자기 꼬리 물고 있는 형상의 무한동력 마조히스트 뱀을 뜻합니다. 통상 캐릭터보다는 순환이나 윤회, 완전성 따위를 상징하는 심벌로서 더 많이 소비되는 친구인데요. 고딕풍의 호러나 오컬트물 등에서 보통 원형 문고리를 얘 조각으로 만들어두는 경우가 많죠. 감독의 셀프 스포일러대로 인과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초현실적 상황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작품입니다. 시나리오 상 특기할 만한 점은 여타 작품들은 두 개의 분리된 세계를 다루는 데 반해 과 그리고 이라는 '세 층위'가 교차한다는 점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나 편집입니다. 현실과 꿈을 그림..

Film/Horror 2021.06.13

현실은 더 잔인하다 _ 다운, 이우수 감독

# 0. 늦은 나이에 임신한 부부. 기쁨도 잠시 양수 검사 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이대로 낳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우수' 감독, 『다운 :: Down Syndrome』입니다. # 1.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고, 잔인한 현실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작품은 중반부 아내가 의사에게 건네는 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거 같으세요?" 이 질문은 감독이 배역의 입을 빌어 스크린 너머 관객 개개인에게 직접 건네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시선에 집중한 연출이 섬세합니다. 윤리와 현실과 책임과 각기 다른 책임을 지는 방식들과 특정한 책임을 강요하는 법의 폭력 사이의..

Film/Drama 2021.06.11

음란마귀 테스트 _ 아, 이성환 감독

# 0. (삐슝빠슝) 충격!! 무섭고 야한 레고 영화가 있다?!?!?! '이성환' 감독, 『아 :: Ah』입니다. # 1.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입니다.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꼬꼬마들이 좋아할 법한 서른 개 남짓의 레고 블록이 이리저리 조합됩니다만, 그 속엔 섹스와 범죄와 폭력과 총기와 전쟁과 사고와 SF 등의 과격한 표현이 난무합니다. 분명 블록들은 그저 특정한 좌표 위에 배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레고 블록들은 상호 교류하는 바 없이 자신의 공간만을 중립적으로 점유하고 있죠. 실제 영화를 프레임 단위로 멈춰 보면, 의 오마주인 듯한 노골적 형상의 기계 로봇 정도를 제외하면 의미를 읽을 수 없는 표현이 다분합니다. 스스로 과격함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라는 등급으로 완성..

Film/Animation 2021.06.07

주인공만 3명 _ 조안, 김지산 / 유정수 감독

# 0. 이젠 제법 익숙한 소셜 미디어 까는 영화입니다. '김지산', '유정수' 감독, 『조안 :: Joan』입니다. # 1. 일반적으로 떠올릴 법한 소셜 미디어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소집해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 단편입니다. 제프 올롭스키의 나, 츠노 메구미의 와 유사한 문제의식 위로 불쾌하고 섬뜩한 미스터리 호러의 장르적 재미를 살짝 더한 작품 정도로 이해하시면 적당하겠군요. 영화에는 총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안과, 소개팅남, 그리고 이름 모를 내레이터죠. 이야기는 조안이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데이팅 어플을 통해 새로운 남자와 소개팅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과정을 소셜 미디어의 의인화로서 내레이터가 전개하는 구성이죠. 각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소셜 미디어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대변합니다. '조안'..

Film/Thriller 2021.05.26

대종상스러운 _ 불륜, 김준성 감독

# 0. 제50회 대종상 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입니다. '김준성' 감독, 『불륜 :: Unlawful Love』입니다. # 1. 드라마 단편선을 보는 것만 같은 익숙하고 안정적인 구성입니다. 노년의 삶이라는 인본주의적 아이템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의 정서와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보수적 가치들을 곧게 묘사합니다. 감독의 연출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을 이끌어 나갑니다. 특히, 배우 '신구' 선생과 '김지영' 선생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탁월합니다. '노년'하면 떠올릴 법한 , , , , , 등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라디오 따위의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아이템들로 연결지어 영화가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주제의식으로 감싸 안습니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모두 선명한 만화적 캐릭터로 묘사해 남녀노소 편안하게..

Film/Romance 2021.05.22

Like a Frame _ 수브니어 애니메이션, 강민지 감독

# 0. like a flame~ you got music and the rhythm burning in my mind~ can't let go, you pull me deeper~ (i'm) dropping like the melting snow. you want it all~ don't wanna fall~ you got me just the same. all i know, your passion burns me like a flame~ '강민지' 감독, 『수브니어 애니메이션 :: Souvenir Animation』입니다. # 1. 수학에서는 을, 두 점 사이를 최단거리로 잇는 점들의 집합이라 정의합니다. 같은 기준에서 은, 특정한 두 시점을 잇는 '순간'들의 집합이라 말할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

Film/Animation 2021.04.27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 _ 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박재인 감독

# 0. 살찐 고양이입니다. 녀석, 선풍기에 발이라도 넣었던 듯 붕대가 메여 있네요. 초여름의 기분 좋은 족욕입니다. 쓰다듬 듯 커튼을 흔드는 바람입니다. 빵 종이의 바스락 거림입니다. 화분을 어루만지는 햇살입니다. 녹아내려 달그락 흔들리는 설탕입니다.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입니다. '박재인' 감독, 『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 Our Spring』입니다. # 1. 문득 올려다보는 가을의 높은 하늘입니다. 책장에서 삐져나오는 낙엽입니다. 소담하게 나누는 차 한잔입니다. 겨울의 바게트와 수프. 오늘의 저녁거리는 고구마 대신 단호박입니다. 매일같이 산책하던 길에 걸터앉아 즐기는 가을의 낙엽. 한점 한점 나눠 먹는 샤부샤부. 눈사람의 코가 되어버린 당근입니다. 남겨진 발자국입니다. 신중하게 고르는 수박. 조..

Film/Animation 2021.04.13

원 히트 원더의 딜레마 _ 낙원의 밤, 박훈정 감독

# 0. 감정이든 행위든 합리성이 부재하다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겉멋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겉멋이냐 간지냐를 구분짓는 건 사소한 디테일을 물고 늘어지는 식의 개연성 진단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직관의 영역에 가깝죠. '박훈정' 감독, 『낙원의 밤 :: Night in Paradise』입니다. # 1. 엄태구 입니다. 역시 멋있어요. 감독 생각하면 당연히 범죄 누아르일 테고 당연하다는 듯 양복 입은 주인공의 멋있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시한부 설정의 이부 누나가 때마침 생일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조카를 데리고 등장합니다. 어째 벌써부터 지루하네요. 다행히 전개는 초고속으로 이뤄집니다. 주인공은 역시나 조폭이구요. 도 회장이라는 경쟁자가 있다는군요. 사랑해 마지않는 누나와 조카가 석동출 당하고, 빡..

Film/Thriller 2021.04.12

상황은 당신을 정의할 수 없다 _ 새벽배송, 김현철 감독

# 0. 배송 아르바이트를 하는 '양균'은 지원을 요청합니다. 추가 인력으로 '수진'이 합류하고, 두 사람은 함께 이른 새벽의 배송을 다닙니다. ‘김현철’ 감독, 『새벽 배송』입니다. # 1. '수진'과 '양균'은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수진'의 차량 배터리가 다 떨어지자 '양균'은 선배가 됩니다. 정산 비율을 이야기하는 순간엔 많지 않은 수당을 나눠가져야 하는 경쟁자가 됩니다. 물품을 나눠 전달하는 동안에는 파트너가 되구요, '수진'이 A4 용지를 배송하던 때를 말하는 순간엔 고생스러운 택배기사가, '양균'이 전 여자 친구의 집에 배송 가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엔 전 남자 친구가 됩니다. 취객이 실수로 잘못 오른 차는 '무례의 공간'이 되지만 다시 돌아온 취객을 태워주는 선택과 함께 '선의의 공간'으로..

Film/Drama 2021.03.27

메타포 찾는 퍼즐 놀이 _ 판문점 에어컨, 이태훈 감독

# 0. 판문점에 설치된 고장 난 에어컨을 고치는 수리기사의 이야기입니다. '이태훈' 감독, 『판문점 에어컨 :: Air Conditioner in PANMUNJEOM』입니다. # 1.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위에 은유가 맛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에 영화가 매몰되어 있다는 점일 겁니다. 런타임 내내 배경이나 등장인물, 대사, 연기, 전개 모두 메세지를 돕는 메타포로서만 기능합니다. 본론에 앞서 분단의 비극이라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박찬욱 감독 작 를 잠깐 살펴보죠. 박찬욱 감독이 제안하는 영화 속 상황 또한 이 작품 못지 않게 도발적입니다만 적어도 그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 '경필', '수혁', '성식', '우진'의 행동만큼은 각자에게 할당된 설정에 부합하는 합리성을 철저히 따릅니다..

Film/Drama 2021.03.19

부족하지만 착한 친구 _ 베란다, 손지수 감독

# 0. 상황 설계와 이야기 구성의 충분한 도움 없이 미리 결정한 메시지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 보통 이런 식의 결과물이 나옵니다. 제18회 대한민국 청소년영화제 수상작입니다. '손지수' 감독, 『베란다 :: Veranda』입니다. # 1. 엄마는 불쌍합니다. 보다 정확히는 불쌍해야 합니다. 감독이 그렇게 결정했거든요. 엄마는 외롭습니다. 엄마는 무기력합니다. 엄마는 기계적이고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은 매몰차야 하고, 아들은 눈치가 없어야 하죠. 역시나 감독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대한 감독의 정의가 폭압적이기에 작품의 결론도, 감상도, 정서도 메시지와 완벽히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불쌍하고, 외롭다. 관객은 이 메시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

Film/Drama 2021.03.01

붕괴 _ 솧, 서보형 감독

# 0. 영화를 보기도 전에 기분이 조금 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제목을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고어 '솧'은 일상적이지도 직관적이지도 않으니까요. 영화 제목은 뭐가 되었든 기본적으로 관객을 위한 마중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감독이 발견한 메시지에 대한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관객의 입장에서 제목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작품인지 전혀 유추할 수 없다면 그건 제목이라 할 수 없죠.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거푸집'이라는 의미로 사전을 뒤지다 '심연深淵'이라는 또 다른 의미에 꽂혀 즉흥적으로 지은 것과 뭐 그리 다르냐 빈정댄다 하더라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겁니다. '서보형' 감독, 『솧 :: Soh』입니다. # 1.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앞서서의 고까운 감..

Film/Drama 2021.02.11

예상한 대로 _ 승리호, 조성희 감독

# 0.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이 영화 시나리오를 썼어요. "우주에서 쓰레기를 주으며 산다.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2092년, 기댈 곳 없는 낙오자 넷. 그들이 천진한 인간형 로봇을 손에 넣는다. 때가 왔다, 위험한 거래를 개시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죠. 일단 미래 우주가 배경이네요. 쓰레기 주으며 사는 밑바닥 낙오자 무리에 대한 이야기면 아이템에서부터 어느 정도 중량감은 필연적이겠군요. 폭탄 어쩌구 하는 내용도 보이고 그걸로 거래를 하겠다는 걸 보니 배드 에스 기믹의 주인공 파티가 벌이는 유쾌 상쾌 통쾌 스페이스 오페라, 뭐 고런 타입의 영화를 썼다고 칩시다. '조성희' 감독, 『승리호 :: SPACE SWEEPERS』입니다. # 1. 자, 여러분이라면 이 시나리오의 주연배우로 누구를 캐스팅하고 싶으신..

Film/SF & Fantasy 2021.02.07

우희에게 _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임오정 감독

# 0. 연락 드럽게 안 하는 우희가 개 구하러 담 넘는 영화입니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옴니버스 영화 중 세 번째 단편, 입니다. '임오정' 감독,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 Call If You Need Me』입니다. # 1. 세 단편 중 가장 이질적입니다. 강동완 감독의 이 연극, 김한라 감독의 이 동화라 한다면 임오정 감독의 영화는 에세이 쪽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작가의 통제하에 있는 조직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한 두 작품에 비해 이 영화는 훨씬 일상성이 강조된 구체적인 서사와 표현으로 전개됩니다. 앞선 두 편에서의 피크닉은 각각 캠핑장과 울릉도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그려집니다만, 이 작품에선 독특하게도 그 역할을 [인물]이 대신합니다. 영신이죠. 그녀는 그녀가 가진 풍부한..

Film/Drama 2021.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