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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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개봉 54

본격! 리듬! 액션! _ 베이비 드라이버, 에드가 라이트 감독

# 0. 쉴 새 없이 가슴을 두드리는 비트와, 몸을 떨게 만드는 엔진 소리와, 마초적인 배기음의 성대한 응대와 함께 엑셀레이터를 힘껏 당기는 두 시간 동안의 레이스입니다. 누가 감히 영화는 이야기라 그랬던가요. 그림이라 그랬던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화려한 드라이빙 스킬로 관객을 레이싱의 매력에 빠트리는 베이비 '안셀 엘고트'도, 수틀리면 샷건부터 갈기고 보는 힙하고 잘생긴 뱃 '제이미 폭스'도, 각기 다른 큐티애교와 섹도시발을 동시에 선보이는 데보라 '릴리 제임스'와 달링 '에이사 곤살레스'도, 연기 잘하는 두 쓰레기도 아닌 음악 그 자체입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 『베이비 드라이버 :: Baby Driver』입니다. # 1. 음악이 플롯과 시퀀스, 공간, 카메라 워크에 대사까지 모조리 장악하는..

Film/Action 2020.05.03

악녀를 보았다 ⅱ _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악녀를 보았다 ⅰ _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 0. 뒷모습으로 소개되는 여자. 실루엣을 짓누르는 베일. 앳되고 가녀린 목소리와, 그를 제압하는 고압적인 저음의 성가. 소녀의 연약한 요구와, 그 요구를 거절보다 폭압적인 명령으로 제압하 morgosound.tistory.com # 6. 돌아온 보리스와 함께 코르셋은 다시 채워지지만, 지금의 코르셋은 이전의 코르셋과는 다르고 지금의 캐서린 역시 이전의 캐서린과 다릅니다. 시아버지와 단둘이 나누는 늦은 저녁의 식사. 테이블의 방향으로 조명이 강하게 집중된 공간을 달그닥 소리를 내며 밀고 들어오는 캐서린. 화면의 중앙을 지배한 캐서린은 이전과 다른 자신을 가감 없이 표출합니다. 전에 볼 수 없던 시원한 웃음과 함께 자유롭게 식당을 가로지르는 동..

Film/Drama 2020.04.03

악녀를 보았다 ⅰ _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 0. 뒷모습으로 소개되는 여자. 실루엣을 짓누르는 베일. 앳되고 가녀린 목소리와, 그를 제압하는 고압적인 저음의 성가. 소녀의 연약한 요구와, 그 요구를 거절보다 폭압적인 명령으로 제압하는 남자. 발가벗겨진 소녀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돌아 눕는 남편. 이를 담아내는 고전적이고 고정적인 오브제들과, 정제된 채도의 색감과, 이질적인 정도로 옆으로 길게 벌어진 화면. 통상의 긴 화면비는 개방감, 안정감, 수평적 운동성, 평등, 균일감 따위를 의미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수평성의 강조'라기보다는 '수직성의 통제', 즉 위아래로 잘려나간 화면이 인물을 짓누르며 지배하고 있는 공간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명령'과 '규율'과 '제약'과 이를 둘러싼 '균열'과 '파괴'의 서사임을 유추..

Film/Drama 2020.04.01

캔디드 캔디드 샷 _ 캔디드 샷, 강민지 감독

# 0. 강렬한 영화입니다. 과감한 영화입니다. 비단 사진뿐 아니라 사회적인 무언가를 관찰하고 다루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밖에 없을, 자신과 창작물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일말의 은유 없이 직설적인 방법으로 다룹니다. 곧게 뻗어나가는 활시위처럼 감독은 과감하고 솔직하고 단호하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보는가. '강민지' 감독, 『캔디드 샷 :: Candid Shot』입니다. # 1. 캔디드 샷 [Candid Shot] 피사被寫의 인물이 포즈pose를 취하지 않거나 본인이 사진을 찍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 # 2. 이 영화는 사진작가가 피사체를 찍는 캔디드 샷이자, 캔디드 샷을 찍는 사진작가에 대한 캔디..

Film/Drama 2020.03.04

가여워라 _ 위로, 정유정 감독

# 0. 솔직히 유치합니다. 일반적인 영화가 아니라 저예산 독립영화의 기준으로 보려 해도 이 영화는 못 만들었습니다. 학생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 기준을 더욱 낮춘다 해도 못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유정' 감독, 『위로』입니다. # 1. 연출도 연기도 대사도 모두 손발이 오그라들게 합니다. 유독 항마력이 없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이구야' 하며 눈을 감게 되는 순간이 몇 분 되지 않는 런타임에도 쉴 새 없이 포진해 있습니다. 마지막에 깔리는 음악에서는 페이탈리티가 터집니다. '어후...' 하고 한숨을 푹 쉬게 만듭니다. 단 1초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만든 것만 같은 특유의 집착이 척추를 뒤틀리게 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진지한 제목과, 포스터에 제목보다..

Film/Drama 2020.02.15

표류 _ 당신의 어항, 장은진 감독

# 0. 두 번 봤습니다. 좋아서는 아니구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그랬죠.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서사를 풀어놓는데요. 오프닝은 이렇습니다. “저는 우주를 만듭니다. 이것은 당신의 어항. 당신의 우주입니다.” ... 뭔 소린가 싶죠. 대사가 죄다 이런 식입니다. 갬성 돋는 형용들을 늘어놓듯 쏟아내는 데 귀에 박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장은진' 감독, 『당신의 어항』 입니다. # 1. 독창적인 표현을 하고 싶다면 서사는 친절해야 합니다. 독창적인 서사를 다루고 싶다면 표현은 친절해야 합니다.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나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같은 영화들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연출과 표현을 시도하는 대신, 서사는 친절하게 전개합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her』과 같은 영화들은..

Film/Romance 2020.02.01

밤의 우유니 사막 ⅱ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morgosound.tistory.com # 6. 세 번째 파트는 '블랙'입니다. 파트의 주제는 '순응'이죠. 수줍음이 많던 샤이론은 마약상이 되어 있지만 타락이나 절망감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성인이 된 샤이론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 보다 정확히는 '복무'하는 인간이 되어 있다는 데 더 가깝습니다. 터렐을 가격한 데 대한 처분을 받고 난 후 샤이론은 멘토 후안과 같은 건장한 남자가 되어 있습니다. 후안 대신 대모 테레사를 아들처럼 듬직하게 지키고 있죠. 엄마 폴..

Film/Drama 2019.12.02

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삭막한 사막과 같은 소년의 삶에 쏟아질 듯 슬픔의 비가 내리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온 세상은 푸르른 달빛에 물들게 됩니다. 별이 빛나는 바다에 뒤덮인 사막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는 소년의 숨 막힐 듯한 고독감과 쓸쓸함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군요. '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 Moonlight』입니다. # 1. 영화는 세 파트의 옴니버스 구조를 가집니다. 각각 소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와 성년기에 대응되죠. 파트의 제목은 '리틀', '샤이론', '블랙'입니다. 서사는 '리틀'로 불리던 소년 '샤이론'이..

Film/Drama 2019.12.01

화가가 만든 영화 _ 러빙 빈센트, 도로타 코비엘라 / 휴 웰치먼 감독

# 0. 그림 그리려고 만든 영화 같습니다. 메시지와 서사와 캐릭터와 플롯과 연출과 대사와 그 외의 모든 영화 안팎의 요소들을 '표현'이 압도합니다. 독창성도 독창성이거니와 화가를 말 그대로 갈아 넣어야만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양식이 절대적인 희소성을 부여합니다. 분명 이 영화가 제공하는 감각을 다른 영화로 비유하는 건 미련한 짓일 겁니다.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먼' 감독, 『러빙 빈센트 :: Loving Vincent』 입니다. # 1.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겠네요.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선명한 인상은 (호들갑을 조금 떨자면)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한 생명력이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통상 애니메이션과 차별되는 12 프레임의 이물감 역시, 되려 심장의 박동처럼 ..

Film/Animation 2019.10.29

다섯 번째 유령 ⅱ _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다섯 번째 유령 ⅰ _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0. 삶의 이유를 지배하는 유령. 불안함과 두려움을 대변하는 유령. 금기에 대한 숨겨진 욕망을 끄집어내는 유령. 희망과 안식의 도피처로서의 유령. 그 한 가운데 표류하는 주인공의 내면에 morgosound.tistory.com # 7. '모린'의 정체성은 다면적입니다. 영매가 주목될 수도 있었구요. 쌍둥이가 핵심이 될 수도 있었죠. 날아다니는 혼령에 대한 이야기를 심화할 수도 '루이스'에 엮인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굳이 영화의 제목으로 를 결정합니다. 타인을 위해 물건을 대신 구매해주는 사람. 그런 직업적 역할 관계를 내면화한 삶과 영혼에 대한 내제적 접근을 풀어 보겠노라 규정합니다. 돌이켜 보면 영..

Film/Thriller 2019.10.02

다섯 번째 유령 ⅰ _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0. 삶의 이유를 지배하는 유령. 불안함과 두려움을 대변하는 유령. 금기에 대한 숨겨진 욕망을 끄집어내는 유령. 희망과 안식의 도피처로서의 유령. 그 한 가운데 표류하는 주인공의 내면에 대한 집요한 탐구입니다. 매력적인 반전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퍼스널 쇼퍼 :: Personal Shopper』입니다. # 1. '모린'은 '키라'의 퍼스널 쇼퍼입니다. 모린은 그녀에게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복무합니다. 모린의 시간과 땀은 키라의 삶을 더욱 화려하고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값비싼 보석과 화려한 드레스를 구매하는 순간엔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결정을 내리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거라면 볼 일 없었더라면 ..

Film/Thriller 2019.10.01

꺼졌으면 좋겠네 _ 람다스, 고잉 홈, 데릭 펙 감독

# 0. 솔직히 '람 다스'가 누군지 모릅니다. 하버드대 교수였다는 데 어디 가봤어야 알죠. 대충 구글 신께 물어보니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깨어난 영적 지도자라 그러네요. 영혼도 누가 지도해줘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前 직업이 교수였다니 직무 특성을 살렸나 보군요. 여튼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이 양반이 이 다큐멘터리 이전에 어떤 작업을 어떤 태도로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관객의 알바가 아니죠. 따라서 전 이 다큐멘터리에 드러난 인상을 바탕으로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데릭 펙' 감독, 『람다스, 고잉 홈 :: Ram Dass, Going Home』 입니다. # 1. 까놓고 말해서 좀 꺼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약쟁이 노인네가 뇌졸중으로 오늘내일하다가 살아난 후 현타가 왔다'는 ..

영상물 _ 걸프렌드 데이, 마이클 폴 스티븐슨 감독

# 0. 『Daum Movie』는 영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운한 기념일 카드 작가가 불행을 당하는 영상물. 정확합니다. 저 문장이 전부입니다. 주인공은 불운하게 실직한 이혼남이구요. 기념일용 카드 문구를 만드는 작가였구요. 이야기 내내 불행하구요. 결과물은 영화가 아닌 '영상물'이죠. '마이클 폴 스티븐슨' 감독, 『걸프렌드 데이 :: Girlfriend's Day』 입니다. # 1. 고전적 화면비의 기념품 카드 광고. 시도 때도 없이 대문짝만 하게 들이미는 주인공의 얼굴. 과감하다면 과감하고 과격하다면 과격한 설정들. 정적인 구도에서 갑자기 벗어나는 핸드헬드 카메라. 미친놈인가 싶은 부엉인지 올빼민지 모를 닭둘기와 섹스하는 전 마누라에, 월세 대신 맡겨진 짐덩어리 꼬맹이가 제각각 따로 놉니다..

Film/Comedy 2019.09.23

단편 몰아보기 _ 기대 / 바빠서 / 한수탕 / 여름의 소리

# 0. 혹자는 예술의 이유를 '언어의 불완전성을 메우기 위해'라 하더군요. 절묘한 말입니다. 언어가 모든 정서나 개념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예술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난임 부부의 오래도록 기다렸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평생 해오던 일을 마무리 짓는 순간, 죽일 듯 미웠던 사람의 비참한 마지막을 지켜보는 순간, 시한부 판정을 받는 어떤 이의 하루. 우린 그런 순간들을 상상하고 서술해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특별한 정서들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박은정' 감독, 『기대』입니다. # 1. 국어사전은 '기대감'을 '어떤 일이나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림'이라 정의합니다. 담백하고 정확한 것 같긴 합니다만 우리가 통상 이해..

Film/Drama 2019.09.16

안아줘요 _ 안젤라의 크리스마스, 데미안 오코너 감독

# 0. 할아버지가 엄마 '안젤라'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오랜 시간을 건너온 할아버지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갔던 '안젤라'의,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시대를 넘어서는 근원적 가치에 대한 향수가 포근한 노년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됩니다. '데미안 오코너' 감독, 『안젤라의 크리스마스 :: Angela's Christmas』 입니다. # 1. 크리스마스 이브, 교회로 향하는 '안젤라'의 가족. 엄마도 눈치채지 못한 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입니다. 큰 오빠 품에 안긴 막내는 안젤라의 옷을 받아 입고, 안젤라는 입이 삐쭉 나온 작은 오빠의 옷을 받아 입습니다. 작은 오빠는 다시 큰 오빠 옷을 받아 입고, 동생들에게 코트를 벗어준 듬직한 첫째는 엄마에게 코트를 양보하죠. 가족에게 자신의 것은 없습..

Film/Animation 2019.08.27

조슈아 영웅전 ⅱ _ 우산혁명, 조 피스카텔라 감독

조슈아 영웅전 ⅰ _ 우산혁명, 조 피스카텔라 감독 # 0. 오프닝부터 분위기를 잡고 들어갑니다. 검은 화면, 쏟아지는 박수소리, 절절한 구호와 이들을 노려보는 경찰들이 연이어 카메라에 담깁니다. 1500여 명의 시민 앞에 어른들은 대체 다 어디 있 morgosound.tistory.com # 5. 닷새째 되는 날 해 뜰 무렵 동쪽에서 나타난 '간달프'가 몰고 온 로한의 기사들처럼. '조슈아'는 '렁춘잉'의 국민교육이란 군대를 멋지게 물리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그는 중간보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루만'이 아니라 '사우론'을 물리쳐야 하죠. 누가 뭐래도 이 사단의 끝판왕은 '시진핑'입니다. 감독은 '렁춘잉'이 폐퇴하기 무섭게 긴장감을 한껏 조성하는 장중한 음악과 함께 끝판왕을 소개합니다. 늙고 ..

조슈아 영웅전 ⅰ _ 우산혁명, 조 피스카텔라 감독

# 0. 오프닝부터 분위기를 잡고 들어갑니다. 검은 화면, 쏟아지는 박수소리, 절절한 구호와 이들을 노려보는 경찰들이 연이어 카메라에 담깁니다. 1500여 명의 시민 앞에 어른들은 대체 다 어디 있느냐 일갈하는 깡마른 소년, 우리는 지금 시대의 문제를 다음 세대에까지 넘기지 않겠다 선언하는 소년이 연단에 서 있습니다. 감독은 지금의 시위를 둘러싼 문제가 이해관계 충돌의 정치 쟁점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가치의 문제라 규정합니다.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광장으로 쏟아지는 시민들에게서 강렬한 현장의 에너지를 전달받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과, 그럼에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합니다. 감독은 오프닝을 통해 소년으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인식과 제작진의 인식이 합..

창렬 _ 브이아이피, 박훈정 감독

# 0. 소신발언 하나 할까요? 여자는 죽여도 됩니다. 까짓 거 강간해도 상관없죠. 아이들도 죽일 수 있습니다. 토막살인을 해도 상관없고 연쇄살인을 해도 상관없죠. 찰지게 다진 다음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도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단, 영화 안에서라면 말이죠. '박훈정' 감독, 『브이아이피 :: V.I.P.』입니다. # 1. 물론 이런 선택이 흥행에는 불리하게 작동할 수는 있습니다. 자극적이고 과감한 표현이 관객층을 제한하는 건 틀림없을 테니까요. 쌩돈 꼬라 박은 투자자들은 무지막지한 연출에 피눈물이 나겠지만, 그런 것 따위 관객이나 감독의 알 바는 아닙니다. 불법의 영역만 아니라면 감독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다듬어 영화를 찍을 권리가 있습니다. 영화적 선택이 자연인으로서의 도덕성..

Film/Thriller 2019.06.17

ZIONT _ 레슬러 자이언 클라크, 플로이드 러스 감독

# 0. 오프닝은 환상적입니다. 강렬한 도입으로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치열한 레슬링에 이어 경기장 한가운데 양팔로 우뚝 선 남자의 모습이 여느 훌륭한 장편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압도합니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이렇게나 경건하고 엄숙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플로이드 러스' 감독, 『레슬러 자이언 클라크 :: ZION』입니다. # 1. 이해와 동정의 차이, 공감과 선의의 거리 자이언 클라크는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이 없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한다 말하죠. 그에겐 하반신이 없는 지금이 정상입니다. 어릴 적 낳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습니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동안 폭력과 학대를 겪어야 했습니다. 삐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서 삐뚤어질 뻔했던 유년기를 붙잡아 줬던 건 레슬링이..

청주대... 영화학과... 메모... _ 어떤 하루, 정가영/전선호/최진혁 감독

# 0.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 '영주', 떠나가 버린 젊은 날을 동경하는 중년의 소녀 '로라', 처절한 현실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가장 '연희'가 그들 나름의 어떤 하루를 보냅니다. 청주대학교 영화학과에서 만들어낸 풋풋하고 생동감 넘치는 단편 옴니버스 영화라. 5월을 시작하기에 딱이군요. '정가영', '전선호', '최진혁' 감독, 『어떤 하루』 입니다. 가을. 그리고 단기. 그리고 방학. [가을 단기 방학. 정가영 감독] # 1.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 '영주'의 이야기입니다. 소녀의 하루는 특별히 비극적이거나 특별히 위험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괴롭히는 건 그저 '무심함'이죠. 친구들은 연주가 엄마와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모릅니다. 절친한 친구도 연주가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고 있다는 건 ..

Film/Drama 2019.05.03

봄날의 수채화 _ 더 테이블, 김종관 감독

# 0. 섬세한 이야기꾼의 습작입니다. 날씨 좋은 날의 한가한 오후. 소소한 약속이 있어 찾은 카페. 작은 눈과 덥수룩한 머리의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작가. 한가로이 사람들을 구경하며 무심하게 눈앞에 놓인 테이블과 음료 두어 잔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를 낡은 재킷 주머니에 걸어둔 만년필을 꺼내 냅킨에 쓱쓱 써 내려간듯한 영화입니다. '김종관' 감독, 『더 테이블 :: The Table』 입니다. # 1. 유명 배우 '유진'과 전 남자 친구 '창석'의 대화는 다른 입장으로 인한 거리감을 다룹니다. 창석은 셀러브리티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은 평범한 직장인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수차례 건네는 '변했다'란 말은 '이해할 수 없다'의 완곡한 표현이죠. 둘은 다른 이유에서..

Film/Romance 2019.04.24

장인의 오르골 _ 인비저블 게스트, 오리올 파울로 감독

# 0. 불륜을 저지르는 주인공은 가족을 속이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에 연루된 불륜녀 역시 거짓말을 하고 있죠. 살인자는 전도유망한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고 피해자의 부모는 가짜 기자 행세를 합니다. 변호사는 사건을 조작하고 살인사건은 교통사고로 둔갑하며 가해자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고 피해자는 횡령범이 되죠. 억지로 십자가에 메어진 교활한 마녀가 죄를 고백하는 동안 순진한 표정의 부자는 흉기를 휘두릅니다. 부끄러운 밀회와 사슴 한 마리에서 시작된 사건은 결국 두 사람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갑니다. 작은 곤란함은 사소한 거짓말과 만나 점점 더 큰 곤란함으로 이어집니다. 거짓말의 연쇄 속에 사건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죠. 관객은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어느 부분을 믿고 어느 부분을 의심해야 할지 끊임없이 시험받..

Film/Thriller 2019.04.12

살아간다 _ 조지아의 상인, 탐타 가브리치제 감독

# 0. 러시아와 흑해에 인접한 인구 500만의 작은 나라. 카메라는 '조지아'의 한 시골마을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과 동행합니다. 상인은 도시의 잡화점에서 유용해 보이는 상품들을 떼다 물류가 닿지 않는 시골 마을에 다시 팝니다. 물건값으론 라리(ლ)화를 받기도 하지만, 감자를 화폐 삼아 무게에 달아 물물 교환하는 것이 더욱 익숙합니다. 사람들은 삶을 녹여 키워낸 감자들을 필요한 물건과 교환합니다. '탐타 가브리치제' 감독, 『조지아의 상인 :: The Trader』 입니다. # 1. 트렁크가 넓은 낡은 승합차엔 온갖 물건들이 실려 있습니다. 여자들을 위한 스카프나 화장품, 핸드백부터 아이들을 위한 온갖 장난감들과 할머니를 위한 강판도 있죠. 조지아의 상인에겐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있습니다. 마치 피리..

세이렌의 노래 _ 마운틴, 제니퍼 피돔 감독

# 0. '세이렌'은 호메로스의 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전설 속 동물입니다. 이탈리아 반도 서부 해안의 절벽과 바위로 둘러싸인 사이레눔 스코풀리 sirenum scopuli 섬에 사는 바다의 님프들이죠. 하신 '아켈리오스'가 무사 '멜포메네나 스테로페' 혹은 '테르프시코라'에게서 낳은 딸들입니다. 섬에 선박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들게 만드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죠.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성들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결박을 풀지 말라고 했죠. 이내 '세이렌'의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