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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세안 _ 피그,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

그냥_ 2024. 5.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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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그의 여행은 결국 마지막 세안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나.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

『피그 :: pig』입니다.

 

 

 

 

 

# 1.

 

거지 꼴을 한 왕년의 슈퍼스타가 납치당한 돼지를 찾는 이야기는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일부는 돼지 버전의 <존 윅>이냐는 둥의 짓궂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섣부른 오해다. 젊은 미국인 감독의 데뷔작은 창작자로서의 야심과 별개로 그렇게까지 장르적이지 않다. 처절한 추격전이나 끔찍한 결말, 최소한의 정돈된 결착 따위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일부 액션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의 내면을 세심하게 매만지는 감정적인 드라마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호흡은 일관되게 느리고 고요하며 진중하다. 심오하고 애처로우며 다소 피학적이기도 하다. 쳅터의 구성에서부터 그러하듯 진행된다기보다는 잔잔하게 나열된다. 일부는 예측할 수 없는 재미가 있다 평하기도 하지만, 얼개가 느슨하다 진단해도 무리는 없다.

 

돼지 추격전의 한 꺼풀을 벗겨내고 나면, '본질'과 '허울' 사이에서의 갈등이 펼쳐진다. 주인공 로빈(니콜라스 케이지)은 15년 후의 미래를 만나고 있는 것이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15년 전의 과거를 만나고 있는 것과 같다. 압도적인 시간이 벌리는 괴리의 핵심은 본질을 잃어버린 자들의 슬픔이다. 영화는 '슬픔에 얽매여 과거에 붙잡혀 버린 사람'과 '슬픔을 과거에 버리고 달아나 버린 사람들'의 충돌을 통해 슬픔과 시간의 관계를 진지하게 조망한다.

 

무언가를 추적하는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발버둥 친다는 면에서 총 쏘는 키아누 리부스보다는 스콧 쿠퍼 작 <페일 블루 아이(2022)>의 크리스찬 베일이 차라리 비슷하다. 혹은, 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령이 되어 돌아다니는 존재가 사라지는 운명 속에 숨겨진 본질을 탐구한다는 면에서 데이빗 로워리의 <고스트 스토리(2017)>와도 연관된다.

 

 

 

 

 

 

# 2.

 

로빈은 고립으로 소개된다. 낡은 오두막과 뻗은 나무의 숲은 누적된 시간의 물리적 표현이다.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며 자연에서 위로를 얻지만 허구적이다. 들창코의 동거자가 주는 위화감은 왜곡된 평화를, 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살림살이를 공급하는 아미르(알렉스 울프)는 불완전한 일상을 의미한다. 그는 오래전 아내를 잃은 것으로 보이고, 이후 유명한 셰프였음이 밝혀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와 상실의 공간'으로서 현대 도시에 대한 일정한 혐오감도 발견된다. 주인공은 특별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두어 달 남짓 일한 주방 보조의 꿈을 기억하고, 찾았던 손님과 대접했던 음식을 기억하고, 조수의 메뉴와 레시피를 기억한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고 이는 몇 번이나 반복했을지 모를 카세트테이프로 상징된다.

 

아미르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파트너다. 로빈에게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있다면 아미르에게는 클래식 음악이 있다. 200년 전에도 아름답고 200년 후에도 아름다울 클래식은 불변이고, 이는 병원에 누은 엄마의 상실을 '외면'하는 어린 소년의 투정이다. 아미르의 무서운 아버지 다리우스(아담 아킨)에게는 음악이 없다. 대신 거액의 돈이라는 무기와, 동굴 같은 저택이란 방패로 무장하고서 상실을 '부정'한다. 그의 강인한 행동은 역설적이게도 상실을 부정하는 비겁함의 반동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런 세 사람의 만찬은 주제의식이 발산되는 순간이다. 상실에 집착하는 로빈과, 상실을 외면하는 아미르와, 상실을 부정하는 다리우스는 오래전 부부가 즐겼다는 요리를 먹는다.

 

요리는 순리를 상징한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고 나면 먹은 것은 사라진다. 좋은 음식의 추억은 오래도록 남지만 새로운 음식 없이 살 수는 없다. 오프닝에서 로빈은 요리사복을 벗었지만 여전히 식재료를 찾고 버섯 타르트를 준비한다는 면에서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암시된다. 이후 이야기 또한 포틀랜드 음식 산업 종사자들과의 접촉인 것은, 모든 사람을 순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나눈 감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핀웨이의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에 대한 일침, 여전한 소금 바게트의 레시피는 일련의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순리 위에 놓인 본질에 다가가는 이야기임을 설명하는 사례로서 친절한 징검다리가 된다.

 

 

 

 

 

 

# 3.

 

만찬을 끝낸 다리우스는 '돼지는 이미 죽었다' 실토한다.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돼지의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pig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로빈과 특별한 교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돼지가 없더라도 트러플을 찾을 수도 있다. 돼지의 죽음에 좌절할 뿐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끝난 후 달라진 것도 없다. 로빈은 여전히 오두막에 앉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노래를 듣는다. 무엇보다 돼지에겐 그 흔한 이름조차 없다. 봉준호의 영화 제목은 <옥자(2017)>다. 주인공 미자와 함께 사는 돼지의 이름인데,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의 인정이자 관계의 인정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로빈과 돼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돼지는 상실이라는 현상을 받아내기 위한 빈 접시에 불과하다. 다리우스가 제안하는 거액에도 흔들리지 않는 돼지는 아내에 대한 로빈의 집착이고, 돼지의 죽음을 선언하는 다리우스의 말은 로빈에게 당신의 아내는 죽었다 말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로빈은 죽음을 외면할 수 있지 않겠냐 미련을 가지지만, 아미르는 죽었다는 것을 단언하며 친구에게 15년 전에서 내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영화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푸른 물길로 시작되어 마찬가지의 물길에 얼굴을 씻는 모습으로 끝난다. 물길은 로빈의 내면에 깊게 흐르는 슬픔이다. 덥수룩한 수염과 지치고 헝클어진 몰골, 흘러내리다 딱지 진 피덩이는 집착과 외면과 부정을 거쳐온 가엽고 버거운 시간의 흔적이다. 홀로 남겨진 남편은 지친 시간의 흔적을 깊은 슬픔으로 씻어낸 후에서야 비로소 아내의 노랫소리를 조금 더 편안한 모습으로 듣는다. 그렇다. 과연 슬픔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¹⁾. end.

 

⁽¹⁾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슬픔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인용.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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