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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폭주하는 자기애 _ 필름시대사랑, 장률 감독

그냥_ 2021. 11.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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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확실히 해이해진 요즘입니다. 며칠 연이어 편하게 떠먹여 주는 영화들만 골라봤다 싶죠. 조수석에 앉아 감독이 직접 말하는 대화만 따라가면 되는 <택시>. 타란티노 옆에서 미녀의 발가락이나 빨면 되는 <데스 프루프>. 세상 친절한 옴니버스 음식 영화 <맛있는 영화>까지. 이쯤되면 슬슬 스스로의 기강을 잡을 때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리스트에 묵혀뒀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겠군요.

 

 

 

 

 

 

 

 

'장률' 감독,

『필름시대사랑 :: Love and...』입니다.

 

 

 

 

 

# 1.

 

제목부터 피곤합니다. 각기 따로 노는 어휘뿐 아니라 특히 혼란스러운 건 조사助詞가 없기 때문이겠죠. 필름 시대의 사랑인 건지, 필름과 시대와 사랑인 건지 아니면 필름으로 담은 시대적 사랑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영화가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이 직접 내건 제목을 만나게 됩니다. 필름時代사랑. 특기할만한 점은 역시나 필름과 사랑은 한글, 시대는 한자로 썼다는 점일 겁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시대라는 글자가 한자여야 했던 이유가 등장하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질적인 표현임엔 분명합니다. 한자라는 다른 언어는 세 어휘를 칼로 자른 듯 분절합니다. 필름의 시대 따위가 아닌 그저 독립된 개념, '필름', '시대',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군요.

 

# 2.

 

첫 번째 장 <사랑>은 짧은 단편으로 시작됩니다. 반가운 배우들이 넷 등장합니다. 화면은 흑백, 장소는 정신병원입니다. 단편의 내용은 대사와 상황이 바스러지는, 일종의 부조리극입니다.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화면의 색이 돌아옵니다. 영화 속 인물과 영화를 촬영하는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서로 보입니다. 조명부 스텝 역 박해일의 불편한 표정입니다. 그는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말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필름 하나를 집어 떠납니다.

 

첫 번째 장은 뭐랄까요. '단서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관객은 아직 흑백 단편의 함의도, 배우들의 배치도, 사랑의 의미도, 필름의 가치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첫 번째 장의 힌트를 발판 삼아 이후의 전개를 풀어나가다 보면 회귀적으로 첫 번째 장의 의미 또한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 3.

 

두 번째 장 <필름>입니다. 화면비가 오래전 영화들의 그것과 같은 4:3, 화질도 낡은 필름의 질감과 크기로 변합니다. 이번 장은 특히 관객을 불편케 하는 도발적인 연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런타임 동안 카메라는 빈 공간을 하염없이 배회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지는 않습니다. 당장 카메라가 있고 공간도 있죠. 낡은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공간을 배회하는 화면 뒤 누군가와, 어떤 공간을 선택하고 어떻게 공간을 배열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판단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말인 즉,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일 수 있겠네요.

 

진행되다 보면 공간을 떠도는 것뿐 아니라 소통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빈 병이 뱅그르르 돈다던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던지 하는 등의 보이지만 않을 뿐 상호작용은 분명히 인지됩니다. 어떤 작용에 의한 것일까에 대한 대답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안성기의 헛손질은 음악이 들리게 만들 테지만, 그게 어떤 음악일지는 관객 개개인의 몫이니까요.

 

지금부터는 제 나름의 몫을 찾아보겠습니다.

 

# 4. 

 

버려진 폐허 안.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소통하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종류의 화면. 저는 이 필름의 공간을 정신적인 공간으로 이해했습니다. 도입의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온 어린 꼬마는 어쩌면, '처음 영화를 접하던 과거의 누군가'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보르헤스 단편소설집.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강한 철학적 영감을 받은 책입니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대문호를 알고 있다면 이해에 적잖은 도움이 될 테죠. 카메라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정신적인 공간이라는 추측이 맞다면 보다 깊은 내면으로 들어감을 의미할 겁니다. 중국어가 들립니다. 만리장성과 분서갱유에 대한 나름의 해석입니다. 보르헤스로 표현된 작가적 철학, 그 아래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가치관입니다.

 

청소부가 닦던 싱크대에 불길이 오르고 있습니다. 병원 침대에는 멸치와 배춧잎, 그 옆엔 의료용 산소탱크가 보입니다. 제의적이기도 하고, 무의식의 영역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던 카메라는 처음으로 뒷걸음질 칩니다. 문이 닫힙니다. 이곳의 문은 닫아둬야 합니다.

 

 

 

 

 

 

# 5.

 

피상적으로 보일 정도의 난해한 이미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낡은 물탱크와 깨진 유리창과 파이프를 따라 늘어선 긴 복도의설비실입니다. 허무하고 건조합니다. 벽에 계란을 하나 던집니다. 무기력입니다. 아래로 수영장과 수영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유동적입니다. 물에 젖은 레코드 판이 보이고, 박해일이 쓰고 있던 것과 같은 모자가 보입니다. 고풍스러운 중국 음악이 들려옵니다. 텅 빈 샤워실에 물이 쏟아집니다. 여정이 계속되면 될수록 보이지 않는 누군가는 점점 한 꺼풀씩 벗어내고 씻어냅니다.

 

논리적으로 연결 지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모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연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기억과 정서와 해석과 사고와 철학의 편린일 뿐입니다. 예술가의 내면은, 아니 사람의 내면은 생각보다 그리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장을 촬영하는 동안 감독은 고통스러웠을까, 아니면 설레었을까. 대답은 알 수 없는 거겠죠. 하지만 어느 쪽이었든 감독에게 있어 가장 강렬했던 순간임엔 틀림없지 않을까요.

 

# 6.

 

세 번째 장 <그들>입니다. 다행히 여긴 좀 쉽습니다. 그들은 '배우'군요. 박해일과 안성기와 문소리와 한예리의 다른 작품들입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는 봉준호와 이창동 등의 이야기니까요. 내 이야기는 글자로 덮어씁니다. 글자는 다시 내면에 울려퍼지는 소리가 됩니다.

 

설정을 더하고 캐릭터를 고르고 그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를 찾는 과정입니다. 다른 감독의 작품이 등장하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캐스팅을 하기도 전에 배우를 배역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감독은 배우가 이전에 촬영한 영화, <살인의 추억>과 <박하사탕> 등을 보는 동안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다루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마지막 아이의 울음소리만은 선명한 소리로 전달됩니다. 아이의 울음소리 위로는 덮어 상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죠. 남의 영화를 통으로 떼온 세 번째 장이 그나마 작품 속 가장 친절한 파트라는 게 아이러니하군요.

 

내면 속 추상적 비논리 공간을 중력이 작동하는 현실세계로 구체화하는 작업. 영화입니다.

 

 

 

 

 

 

# 7.

 

네 번째 장 <또사랑>입니다. 처음의 영화가 반복됩니다. 다만 등장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공간 같은 시퀀스에 미묘하게 다른 대사 다른 전개입니다. 촬영되기 전 러프한 시나리오인 걸까요. 의사가 말하는 '안경 끼고 키 작은 중국인 환자'는 누가 봐도 '장률'입니다.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감독이 완전히 가려지지 못한 채 노출되기도 합니다.

 

카메라는 움직입니다. 철저한 감독의 시야입니다. 연출만 선명히 남아있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입니다. 관객은 우울증에 걸렸다는 안성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허공에 손짓으로 연주하던 할아버지처럼, 허공을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있으니까요. 긴 복도를 지나 문소리가 안성기를 칼로 찌른 후, 컷 소리 대신 박해일의 모습까지 카메라가 따라갑니다. 당연합니다. 이 이후까지가 모조리 장률의 영화이기 때문이죠.

 

항의하던 박해일은 이번엔 감독에게 사과한 후 시를 한 수 읊습니다. 이후 <후쿠오카>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게 될 윤동주의 <사랑의 전당>이군요. 또사랑에서의 박해일은 사랑에서의 박해일과 달리 감독의 시야를 가지게 된 걸까요. 지하도를 걸어 내려가 강가에 앉은 박해일 옆에 웬 노인이 앉습니다. 박해일이 빈 손으로 음악을 연주하자 음악이 들리는 부분. 카타르시스가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저기, 사랑을 믿으세요?" 노인은 답이 없고 박해일은 떠나갑니다. 노인도 떠나갑니다. 웅성이는 소리. 이 소리는 카메라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역시 이 작품은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를 상상하는 이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 8.

 

정신적이기도 하고, 제의적이기도 하고, 문학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영화 속 메가폰을 잡는 감독이자, 안성기이며, 문소리이고, 박해일이자, 한예리입니다. 미쳐 소리 지르는 환자이자, 환자를 관리하는 의사이며,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온 어린 꼬마 아이이기도 합니다. 카메라가 배회한 모든 공간들과, 검은 옷을 입고 죽은 것과, 흰 옷을 입고 살아있는 것과, 들리지 않는 소리와 보이지 않는 사람이자, 무엇보다 카메라 그 자체이기도 하죠.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해체해 시스템의 프로세스 위에 흩뿌려둔 것만 같은 작품이랄까요.

 

영화 내내 각기 다른 차원의 레이어들과, 같은 차원 다른 위계의 레이어가 각기 다른 관념과 이미지를 짊어진 채 부유합니다.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 모습 그대로 허무하게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이미지를 억지로 끌어내려 조립하기보다는 부유하는 상태 그 자체를 조망하는 듯한 감각을 느껴보시는 편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 그나마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드럽게 불친절하고, 그 불친절함의 가치를 본인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데 게으르다는 점까지 변호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어렵게 표현되는 대상이라는 것이 결국 '본인'이라는 데에서 폭주하는 자기애 같은 게 옅보여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구요. 네 명의 배우를 들러리 삼는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관객마저 들러리가 되어선 영 곤란하죠. '장률' 감독, <필름시대사랑>이었습니다.

 

# +9. 영화도 난해하고~ 글도 난해하고~ 나도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고~ 원래부터가 그렇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 +10. 에라 모르겠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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